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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8. 2023

한 밤에 놀이터에서 4

며칠 후 늦은 밤. 놀이터에서 소희가 줄넘기를 한다. 줄넘기를 꾸준히 한 이후로 눈에 띄게 체중이 줄었고 몸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단순히 운동만으로 몸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게 신기하다. 오늘은 그 어느때보다 열심히 줄넘기를 한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까지, 심장이 터지기 직전까지 하다가 그네에 앉았다. 숨을 아주 크게 몰아쉬다가 스마트폰에서 음악을 틀었다. 최신 유행하는 발라드 곡이 무선 이어폰에서 흘러나온다. 음악의 리듬과 템포에 맞춰 그네를 앞뒤로 흔든다. 기분이 좋다. 두 눈을 슬며시 감았다. 새까만 어둠이 눈 앞에 칠해졌고, 머리 안에는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흔들리는 그네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공중에 붕 떠서 다른 세계로 인도되는 느낌이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고, 블랙홀에 빠져 소멸하고, 빛조차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고립된 기분이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어렸을 때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믿었던 때가 떠올랐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때도 이런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던 것 같다. 이러한 생각과 감각은 자발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저절로 내면으로 스며들었다. 이때 스마트폰이 진동하면서 음악이 끊기고 “이.소.미.님.의.전.화.입.니.다.”라는 마치 커다란 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정확히 쪼개는 듯한 딱딱한 소리가 이어폰에서 들렸다. 소희는 두 눈이 번쩍 떠졌고 흔들리는 그네는 멈추었다. 소희는 스마트폰을 멍하니 바라본다. 화면에 <배신자♥>라는 글자가 떠있다. 
 통화 버튼을 터치를 하고 무심하게 말한다. “언니.”
 “집이 아니라 밖에 있구나. 이 늦은 시간에 어디야?”
 소미는 소리에 매우 민감한 편이어서 주변 소리를 듣고 집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집 앞 놀이터에 있어. 지금 주위가 엄청 조용한데도 밖이라는 걸 바로 아네. 언니야 말로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기는 그냥 안부 차 전화했어. 잘 지내지?”
 “응.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언니는 회사는 잘 다니고 있어?’”
 ”나는 회사 다니는 게 아주 죽을 맛이야.”
 “일이 많이 힘드나 봐? 언니는 스트레스 안 받고 요령껏 잘 할 것 같은데.”
 “일은 전혀 안 힘들어. 오히려 재미있어. 문제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는 거야.”
 “같이 일하는 사람 때문에?”
 “회사에 이상한 새끼 하나가 있어. 입사 동기 중에는 그 새끼 때문에 그만둔 애도 있어. 걔가 회사 그만 둘 때 인사과에 면담하면서 그 인간 행태에 대해서 낱낱이 얘기를 했는데. 그 이후로 조금 나아기지는 했어. 한 명 희생하고 나머지가 좀 편해졌지. 그래도 예전보다 덜해도 여전히 사람들을 교묘하게 괴롭혀.”
 “뭐 어떤 사람이길래 그래?”
 “완전 사이코 새끼야. 회의 시간에 별 것도 아닌 걸로 꼬투리를 잡아서 여러 사람 앞에서 팀원 한 명을 망신주기도 하고 말도 안되는 부당한 일을 지시하기도 해. 말본새는 정말 최악이야. 은근히 말을 기분 나쁘게 한다니까. 칭찬을 가장해서, 농담을 가장해서, 조언을 가장해서 말하면서 상대방을 은근히 기분 나쁘게 하는 아주 특별한 재주가 있어. 하나하나 나열하기 힘들 정도야. 하여간 그 인간 때문에 스트레스야. 우리 팀원 중에 마음이 아주 착하고 여린 동료는 그 인간한테 하도 시달려서 심리상담까지 받고 있어.”
 “언니한테는 심하게 안 해?”
 “당연히 나한테도 그러지. 나는 그런 거에 내성이 강해서 그나마 잘 버티는 편이야. 뭐..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 그 새끼가 사라지는 날이 오겠지, 하고 다니고 있어. 돈 버는 게 쉬울 리가 없다는 걸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많이 힘들겠다.”
 “어쩌겠어, 어디를 가나 그런 인간은 꼭 하나씩 있다고 하니까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그래도 내가 직접 돈 버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 큰 돈은 아니지만 매달 통장에 돈이 딱딱 꽂히면 살맛이 난다니까.”
 “역시 언니답다. 며칠 전에 아빠..” 소희가 말을 하는 와중 솜이가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나 작은 소리로 “야옹”하며 인사를 한다. “안녕.” 소희가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안녕이라니.. 설마 고양이한테 인사한 건 아니지?” 소미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마.. 맞아. 고양이가 나타나서 인사했어. 고양이 소리 들렸어?”
 “응. 주변이 조용해서 잘 들리던데. 뜬금없이 고양이한테 인사를 왜 한 거야?”
 “우리 아파트에 고양이 많이 살잖아. 요즘 밤에 집 앞 놀이터에 자주 나와서 운동도 하고, 머리도 식히고 그러거든. 이 고양이가 놀이터 근처에 살아서 여기 올 때마다 자주 만나. 자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어. 요즘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누는 내 친구야.”
 “친구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다마는 고양이랑 대화를 한다고?”
 “응.” 전화로 얘기 중이지만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어릴 때부터 애가 현실적이지가 않았어. 인형 붙들고 그렇게 얘기하더니 지금은 동네 고양이랑 말하는 거야? 한 때는 외계인 이야기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너는 대학생이 돼서도 그렇게 공상에 빠져 있냐? 아휴.” 소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살아있는 생명체랑 대화를 한다니 예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진심으로 대화를..”
 소미가 말을 끊는다. “됐고. 아빠가 뭐 어쨌다는 거야?”
 “얼마 전에 아빠하고 통화했는데 언니한테 용돈 보냈는데 언니는 잘 받았다는 연락도 없고, 아빠가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는다고 그러더라.”
 “당연히 일부러 안 받았지. 그래서 뭐라고 했어?”
 “언니는 아빠한테 연락도 안하고 취업해서 돈도 버는데 뭐하러 용돈 보내느냐고 했지. 언니도 아빠랑 연락하면서 지내는 게 어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가 연락하는 것도 못마땅한데 말이야.”
 “아빠 재산이 우리한테 하나도 안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잘못하다가는 그 여자하고 그 애한테 재산이 다 넘어갈 수도 있어.”
 “설마. 아빠가 그렇게까지 하겠어. 그 년이랑 그 애새끼한테 넘어간다는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네.”
 “그러니까 말이야. 아빠까지 뺏긴 것도 화나는데 재산마저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야. 한 푼이라도 우리가 더 챙겨야 해. 세상에는 공짜가 없어.”
 “이런 면에서는 굉장히 현실적이네. 맞는 말이야. 세상에 공짜는 없어. 부모 자식 간에도 말이야. 네 얘기 들으니 연락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 꼬맹이 녀석한테 과외 선생님도 소개해 줬어.”
 소미가 황당하다는 듯 묻는다. “과외 선생님을 소개했다고? 아빠가 부탁한 거야?”
 “아니. 그냥 내가 먼저 제안했어.”
 “무슨 과목을?” 
 “영어회화. 아빠 말로는 그 여자가 엄청 만족한데.”
 “누구를 소개시켜 준 거야?”
 “초등학교 친구인데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영어가 네이티브야.”
 “과외 선생님을 소개시켜줬다는 게 너무 뜬금없는데.”
 “말했잖아.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음.. 아빠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먼저 제안했다는 게 너무 엉뚱한 것 같아서. 그 과외 선생님은 남자야?”
 “응. 남자 맞아. 그냥 친구일 뿐이야.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못 보다가 대학 와서 우연히 만났어. 우리 학교 다니더라고. 아무 사이 아니고 그냥 친구일 뿐이야. 촌스러운 것도 싫지만 나는 남자가 그렇게 잘 꾸미고 다니는 날라리 같은 스타일도 안 좋아해. 생김새도 매끈한 게 바람둥이 분위기가 풍겨서 사귀는 상대로는 완전히 아니야. 실제로도 바람둥이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 어쨌든 나는 그런 스타일은 안 좋아해. 친구로서는 괜찮아. 똑똑하고 재미있고 착해. 그냥 친구로 옆에 두기에는 딱이야.” 소희는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누가 뭐라고 했어? 나는 그냥 남자냐고 물어봤을 뿐이야. 왜 갑자기 흥분하고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는데 말이야. 쓸데없는 말이 많은 거 보니까 오히려 좀 수상해?”
 “수상하기는 뭐가 수상해?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아빠가 걔를 봤는데 괜찮은 학생 같다고 나랑 엮으려고 하잖아.”
 “그래? 그건 아빠가 엮으려고 한 거지, 나는 그냥 성별만 물어봤을 뿐이라고. 그리고 너 아빠 때문에 바람둥이 트라우마가 있나 보다. 그럴 거 없어. 세상 남자들이 다 아빠 같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겉모습만 보고, 단편적인 것만으로 그렇게 네 마음대로 판단하면 안되는 거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거 아니야. 언니가 몰라서 그래. 민수 주말에 클럽 엄청 다녀. 클럽 좋아하는 거 보면 뻔하지, 안 그래?”
 “하여간 진짜 답답하다. 클럽 좋아하면 다 바람둥이야? 나도 클럽 많이 다녔고 내 주위에 클럽 좋아하는 애들 많아. 다들 바람기도 없고 성실하게 잘 살아. 사람은 겪어보지 않고는 잘 모르는 거야. 심지어 나는 나와 25년 이상을 함께 살았지만 아직도 내 자신을 잘 몰라. 하여튼 너는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아. 늦었다. 다음에 만나서 자세히 얘기하자. 고양이랑 대화하지 말고 얼른 집으로 들어가. 이만 끊을게.” 소미가 전화를 끊었다.
 “내가 볼 때는 언니도 좀..” 신호가 끊겼다. 소희는 황당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본다. “뭐야.. 자기 말만 하고 그냥 끊어버리고. 아우, 짜증나. 항상 자기 멋대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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