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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9. 2023

한 밤에 놀이터에서 5

전화를 끊고 혼자서 투덜거리는 소희를 보면서 솜이가 “야옹”하고 소리를 낸다. 소희는 바로 귀에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뺏다. 
 “내 얘기 들어주고 나를 이해해주는 건 솜이 너 밖에 없어. 도대체 이해가 안돼. 저번에 아빠는 나랑 민수랑 엮으려고 하지 않나. 언니는 이상한 뉘앙스로 과외 선생님이 남자인지 물어보고 말이지. 마치 내가 걔를 좋아해서 과외를 소개한 것처럼 말하더라고. 정말 기가 막히네.”
 “야옹.” 솜이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소리를 냈다.
 “뭐?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솜이, 네가 언니가 하는 말을 직접 듣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언니는 분명히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게 맞아. 음..” 소희가 잠시 고민을 한다. “너니까 말해주는 거야. 솜이 너는 편견 없이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내가 민수를 초등학교 때 좋아하기는 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걔는 내 스타일이 전혀 아니거든. 어렸을 때는 모범생이어서 내가 좋아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물론 친구로는 괜찮지만 말이야.”
 “야옹, 야옹.” 이번에 솜이는 여러 차례 소리를 냈다.
 소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역시 너뿐이야. 내 말 믿어줘서 고마워. 인간들은 세상을 자기가 보고싶은 대로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어 버리는 성향이 매우 강해.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뇌 안에서 조작을 하는 것 같아. 자신 삶에 자기가 주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착각이야. 인간의 뇌 안에는 인간을 조종하는 어떠한 존재가 있는 게 분명해. 알 수 없는 그 존재에게 끌려 다니고 있을 뿐이고 그 존재는 그리 현명하지도 못하고 아주 이기적이야.”
 솜이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미간을 찡긋했다. 이해를 할 수 없거나 의아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표정과 몸짓이다. 그 표정과 몸짓의 언어를 보고 솜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바로 읽어냈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건 뿌듯함이자 큰 기쁨이다. 감사하게도 솜이와 진짜 친구가 되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음..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아. 나는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하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 어린 애가 보아도 상식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았어. 물론 논리나 상식이라는 단어를 알지는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저 사람들 뇌 안에서 누군가 조정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 그때 나는 내가 외계인이라고 생각 했어. 그래서 인간들처럼 내 머릿속에는 나를 조정하는 그런 이상한 존재가 없다고 믿었어. 그런데 커가면서 내가 외계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나의 뇌 안에도 나를 조정하는 이상한 존재가 있기 때문에 말이야.”
 솜이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멀뚱멀뚱한 표정이다.
 “아마, 너는 고양이라서 외계인이라는 개념이 없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얘기를 들어줘서 너무 고마워.”
 솜이가 오른발을 들어 몇 번 위아래로 흔들며 “야옹”하고 소리를 낸다.
 “초등학교 때 민수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했었냐고?” 소희의 표정이 마치 예전 일을 떠올리듯 아련해졌다. “지금은 큰 편이지만, 초등학교 때 나는 키가 많이 작은 편이었어. 5학년 때 한 반이 스무 명이 조금 넘었는데 나보다 작은 친구가 한 두 명 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해. 거기다가 성격이 활발하지 않고 조용한 편이어서 그렇게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어. 초등학교 때 나는 그냥 공부만 잘 하는 학생이었어. 그 시절 나는 한 마디로 별로 존재감이 없는 조용한 모범생이었어. 그러다 보니 친구들한테는 인기가 없고 선생님들은 나를 무척 좋아했지. 반면에 민수는 초등학교 때 남다른 아이였어. 키도 크고 잘 생겼고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스타일도 남달랐어. 당연히 영어도 잘 했고. 그런데 우리 말 억양이 조금 어색하고 제스처도 과장된 면이 있었어. 친구들이 그런 걸 흉내 내고는 했는데 민수는 성격도 좋아서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아 했어. 그렇게 이국적인 분위기와 여유 있는 모습에 관심을 많이 받는 아이였고 친구도 많았어. 민수랑 달리 나는 친구가 많지 않고 앞줄에 앉은 몇몇하고만 친했어. 내가 민수를 좋아하는 건 그 친한 친구들만 알고 있었어. 내 생일에 그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조촐하게 생일 파티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문득 민수도 초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같은 반이었지만 그때까지 나는 민수랑 말 한 마디 해본 적이 없는 사이였어. 그런데 소심했던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민수를 내 생일에 초대했어. 민수한테 직접 말한 건 아니고 카드로 초대장을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민수 책상 서랍에 몰래 넣어두었지.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에 일찍 등교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민수 책상에 초대장을 넣었어. 그러고 나서 초조하게 민수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지. 같은 반 아이들이 하나 둘씩 오기 시작하니까 가슴이 빠르게 콩닥거렸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수가 나타났고 바로 자리에 가서 앉더라고. 가슴은 더 빨리 뛰고 괜히 혼자 얼굴이 빨개졌어. 내가 초대장을 넣어두었다는 걸 아는 앞자리 친구들과 함께 민수를 힐끔힐끔 쳐다봤어. 오자마자 민수는 친구들과 얘기를 한참 하더라고. 그러다가 책상 서랍에 내가 넣어놓은 카드를 발견했고 초대장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라. 혹시나 민수가 나를 쳐다볼까 싶어서 재빨리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보면서 공부하는 척했어. 친구의 말에 의하면 민수가 초대장을 읽으면서 미소를 지었다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민수가 생일 파티에 오겠구나 하고 생각했어.”
 날카로운 솜이의 눈매가 동그래지면서 “야옹”하는 소리를 냈다.
 소희가 고개를 흔들면 말을 이어간다. “아니. 오지 않았어. 그날 얼마나 실망하고 서운했는지 몰라. 파티에 온 친구들은 여자들만 오는 생일 파티에 민수가 혼자 오기에는 뻘쭘했을 거라고 나를 위로했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위로에 실망감이 사라지지는 않더라고. 친구들이 가고 방에서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내 마음만 들킨 것 같아서 엄청 창피했어. 어떻게 보면 창피한 일도 아닌데 말이지. 그날 민수 집에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이미 다른 약속이 있었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사실 말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친구의 초대가 많이 당황스러웠을 거야. 그런 뜬금없는 초대에 온다는 게 말이 안되지.”
 솜이가 “야옹, 야옹.”을 수차례 반복했다.
 “그날 이후로 민수를 좋아하는 마음을 접은 거냐고? 당연히 아니지. 마음을 스위치처럼 껐다 켰다 할 수는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바로 마음을 접을 수 있겠어? 민수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그러고 시간이 지나고 발렌타인 데이에 쵸콜릿과 카드를 민수에게 줬어. 카드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는 않는데, 좋아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담았던 것 같아. 그날도 똑같이 아무도 등교하기 전에 학교에 제일 먼저 가서 책상 밑에 넣어 놓았지. 물론 쵸콜릿을 선물한 건 나만은 아니었어. 민수는 인기가 많았으니까. 초등학교 때 민수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어. 6학년 때는 서로 다른 반이 됐고 민수는 중학교 때 다시 미국으로 갔어."
 솜이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야옹"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대학에 와서 다시 우연히 만났어." 소희가 피식 소리를 내며 웃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어서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 민수가 나한테 다가와서 말을 걸었어."
 엎드려 있던 솜이는 몸을 세워 앉으면서 민수가 먼저 소희를 알아본 건지 물었다.
 “아니, 나를 알아본 건 아니었어. 도서관에서 민수는 내가 앉은 맞은편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나를 계속 유심히 보고 있었대. 그러다가 내가 나가니까 따라 나온 거고, 도서관에서 나오자마자 나한테 말을 걸더니 자기는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다고 소개를 하면서 전화번호를 물어보더라고. 그때 민수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나도 바로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굉장히 낯이 익었어.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바로 떠오르지는 않더라고. 그런데 목소리까지 귀에 익은 거야. 민수가 뭐라고 뭐라고 계속 말을 하는데 내용은 하나도 안 들리고 목소리만 귀에 꽂히는 거 있지. 목소리를 듣다 보니 어릴 적 민수 얼굴이 번뜩 떠올랐고 내 앞에 있는 남자가 민수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어. 신기하게도 어렸을 때 목소리가 남아있더라고. 변성기를 거치면서 목소리는 완전히 달라지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가 봐. 정신을 차리고 내가 반갑게 너 이민수 맞지?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고 하면서 나를 기억하는지 물었어. 한참 동안 긴가민가하더니 결국 민수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초등학교 때 비하면 많이 변했으니까. 나 남소희야, 기억 나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어. 그런데도 기억을 못하더라고.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기억하는 척했지만 끝내 기억을 못 했어. 그날은 전화번호만 주고받았고 다음날 만나서 커피를 마셨어. 그날 이후로 종종 만났어. 민수 집이 바로 이 근처여서 수업 마치고 같이 전철 타고 집에 올 때도 있었고, 초등학교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기도 하면서 친해졌어. 이런 우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거야. 너무 신기하지 않아?”
 매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솜이가 “야옹, 야옹”하며 소리를 낸다.
 “생일에 초대한 거랑, 발렌타인 데이에 선물한 거 기억하는지 물어봤냐고? 아니 안 물어봤어. 내 존재 자체를 몰랐는데 그걸 기억하겠어? 내가 어릴 때 나를 좋아했던 사람이 성인이 돼서 나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본건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는데, 초등학교 때의 나를 전혀 기억 못하는 건 아주아주 기분 나빴거든. 당연히 기억 못 할 것 같아서 물어보고 싶지 않았어. 확인하고 나면 괜히 기분만 더 나쁘지 않겠어?”
 소희가 시간을 확인한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는 들어 갈게.”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고 하는데 솜이의 눈 사이 위쪽에 작은 상처가 보였다. 어떻게 하다 다쳤는지 물어보니 나뭇가지에 긁혀서 상처가 났다며 별거 아니라고 솜이가 대답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침대에 누우니 솜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에 난 상처가 마음에 쓰인다. 놀이터가 어둡기도 했지만 바로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 그동안 자신의 얘기만하고 솜이에게 관심을 많이 못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소희는 솜이와 오래오래 함께 하기를 바라면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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