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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11. 2023

한 밤에 놀이터에서 7

일주일 후 늦은 밤. 소희는 일주일 동안 이런저런 일로 놀이터에 오지 못했다. 오늘은 줄넘기를 하러, 혹은 전화를 하러,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히 솜이를 보러 왔다. 
 "솜이야, 솜이야." 조용하게 솜이를 불렀다. 
 5분 정도 지났지만 솜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목소리를 조금 높여 솜이를 다시 부른다. 그리고 또 5분이 흘렀지만 솜이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일주일동안 오지 않아서 내가 오늘도 안 올 수 있다는 생각에 어디 다른 곳에 있나 보다. 소희는 기다리다 보면 나타나겠지, 하고 그네에 앉았다. 천천히 그네를 타면서 아무 생각 없이 솜이를 기다린다. 별 생각없이 멍한 채로 그네를 탄다. 그네는 천천히 진자 운동을 반복한다.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그네의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일정한 리듬 때문인지 유난히 마음이 편하다.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솜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은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 동안 오지 않았던 것이 후회된다. 이래저래 나름대로 많이 바쁘기는 했지만, 시간을 쪼개서 오려고 했으면 충분히 올 수도 있었다. 그동안 솜이가 어떻게 지냈을 지 몹시 궁금하다.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별별 생각이 떠오른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일주일동안 안 와서 삐졌나? 이 근처에 있지 않고 어디 멀리 갔나? 오늘 못 보면 내일은 만나면 되지.’ 
 이때 "야옹"하는 솜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바로 신경이 곤두섰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솜이가 놀이터 한 구석에 얌전히 앉아서 소희를 보고 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반가움 마음에 솜이를 향해 양손을 흔들며 말했다.
 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여유 있는 걸음이로 서서히 다가온다. 다가오는 솜이의 얼굴을 보고 반가워하는 소희의 표정이 일시에 사라졌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곳 안으로 들어오면서 솜이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얼굴에 큰 흉터가 있다. 예전에 봤던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상처다.
 “솜이야, 얼굴이 왜 그래? 동네 아이들이 그랬어?” 
 “아니, 아이들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누가 이런 짓을 했어? 상처가 깊어 보여.”
 “산책로 주변에서 살고 있는 고양이가 그랬어.”
 “산책로 고양이가 그랬다고? 산책로에서 자주 보이고 토실토실하게 생겨서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바로 그 고양이를 말하는 거야?”
 “맞아, 바로 그 놈이야.”
 “그 고양이 엄청 순하고 착해 보이던데. 싸운 거야?”
 “싸운 것이 아니라 그 놈한테 일방적으로 당한 거야. 체격 차이를 보면 알겠지만 그 놈한테 내가 당해낼 수가 없어. 어제 저녁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밥을 준 캣맘이 사라지자마자 그 놈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나를 위협하면서 공격하기 시작했어. 내 밥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저항을 해봤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어. 얼굴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고 내 밥은 뺏기고 말았어.”
 “산책로 근처에도 먹이를 줄 텐데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던데 생긴 거랑 완전히 다르네. 이 아파트 단지 안에 내가 모르는 또다른 세상이 있구나.”
 “그 놈은 이 아파트 단지 생태계의 최상위 권력자야. 그 놈은 나뿐만 아니라 여기 사는 고양이들을 엄청 괴롭혀. 괴롭힘에 못 이겨서 이 아파트 단지를 떠난 고양이도 많아. 나랑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그 놈이랑 치열하게 싸우다가 큰 상처를 입고 결국 죽었어."
 "고양이가 고양이를 죽였다고?"
 "응. 그 정도로 그 놈은 흉악하고 잔인해. 완전히 악마야."
 "같은 종족을 죽이기까지 하다니 진짜 악마네. 착한 고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여기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착한 고양이가 없는 줄 알고 있어. 그러면 다른 고양이들과 연합해서 그 고양이를 쫓아낼 시도는 안 해봤어?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말이지.”
 “워낙 싸움을 잘 하는 데다가 그 놈 곁에서 수발을 드는 몇몇 고양이가 있기 때문에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아.. 그렇겠구나. 당연히 그 놈을 따르는 고양이가 있겠지.”
 “우리 고양이뿐만 아니라 이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까치들도 그 놈을 엄청 싫어해.”
 “까지도 괴롭혀? 까치는 날아다니는데 그게 가능한가?”
 “까치들은 그 놈을 죽이고 싶어해.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간 사이에 둥지에서 새끼 까치가 떨어지는 사고가 종종 발생해. 그렇게 되면 그 새끼 까치는 그 놈의 장난감이 되는 거야. 새끼 까치를 물고 뜯고 가지고 놀다가 발기발기 찢어 죽여. 아주 잔인하게 깃털을 다 뽑아버리고 살을 발라서 뼈만 남겨 버려.”
 마치 눈앞에서 그 광경을 보는 것 마냥 소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잔인하다.”
 “고양이 습성상 그 놈이 아니더라도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까치를 괴롭히는데 이 동네에서는 떨어진 새끼 까치를 다른 고양이들은 건드릴 수가 없어. 그랬다가는 목숨이 성하지 못 해. 측근 고양이들이 돌아다니다가 바닥에 떨어진 새끼 까치를 발견하면 즉시 그 놈에게 갖다 바쳐. 어미새는 자기 새끼가 죽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까치들과 그 놈과 전쟁이 벌어졌어. 몇 차례 싸움에서 그 놈의 패거리가 모두 승리했어. 어찌나 민첩하고 힘이 센지 날면서 공격하는 새도 못 당하더라고."
 "그 놈과 싸운 까치들은 어떻게 됐어?"
 "몇몇은 죽었고 몇몇은 다른 곳으로 떠났어."
 "안타깝다. 다같이 잘 살면 좋을 텐데.”
 “한 때는 새로 유입된 까치와 그 놈이 동맹을 맺은 적이 있었어.”
 “동맹을? 그건 또 왜 그런 거지?”
 “새로 온 까치가 둥지를 튼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디선가 까마귀 몇 마리가 우리 아파트로 와서 자리를 잡으려고 한 적이 있어. 그때 까치와 까마귀가 세력다툼을 하다가 까치가 까마귀에게 밀리기 시작하자 새끼 까마귀를 그 놈한테 가져다 받치면서 동맹을 맺었어. 그 악마와 까치가 연합이 돼서 까마귀와 전쟁이 벌어졌지. 당연히 까마귀들이 패배하고 처참하게 쫓겨났어. 새로운 까치들은 까마귀만 사라지면 동맹관계는 유지되고 여기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건 완전한 오판이었지. 그 놈이 얼마나 악랄한지 몰랐던 거지. 그 놈은 바로 또 새끼 까치를 자신의 장난감으로 삼았고 까치와 전쟁을 벌였어. 결과는 언제나 똑같고 그런 일은 계속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어. 산책로에는 나무가 우거져서 예전에는 다양한 새들이 많이 살았어. 박새, 뱁새, 노랑딱새, 직박구리, 오목눈이 같은 새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그런데 솜이야. 그럼 너는 다른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면 그 놈을 피할 수 있을 텐데 왜 떠나지 않는 거야?”
 "음.." 솜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에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아. 가끔 이렇게 부딪히는 경우도 있지만 적당히 그 놈을 잘 피하기만 하면 여기서 사는데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해. 그리고 모르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 안에 있는 것도 같아. 어쩌면 그 놈의 폭력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그런지 그 놈을 피해 이 아파트 단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어."
 "그럴 수도 있겠다. 태어나서 계속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 그 놈을 피해서 여기를 떠난다 해도 새로운 곳에는 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불확실함에서 오는 불안도 클테니까. 어쨌든 너한테 그런 사연이 있는 줄 전혀 몰랐네. 그 동안 너무 내 얘기만 하고 너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지 못해서 미안해."
 "전혀 미안할 필요 없어. 그런 불안한 일상에서 소희와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위안이니까. 그런데 소희야, 궁금한 게 있어?"
 “뭐가 궁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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