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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12. 2023

한 밤에 놀이터에서 8

“민수를 왜 과외 선생님으로 소개했는지 궁금해. 아버지께서 먼저 알아봐 달라고 한 것도 아니라면서.”
 “맞아. 아버지가 부탁한적 없어. 내가 그냥 소개했지.”
 “그러니까.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솜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사실은.. 이것도 너에게만 말하는 거야. 복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야.”
 “복수를 하려고 했다고? 누구한테 복수를 한다는 거야?”
 “모두에게 하려고 했어. 아빠, 아빠를 뺏은 그 여자, 그리고 민수까지.”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게 민수를 과외 선생님으로 소개한 것이 어떻게 복수로 이어질 수가 있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민수랑 그 여자랑 눈이 맞아서 바람이 나기를 바랬어. 민수가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또 그렇게 되면 아빠가 민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까. 민수는 바람둥이고 그 여자는 남의 남자를 뺏는 성향의 사람이니까 충분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어. 그럼 모두에게 복수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게 과연 복수일까?”
 “그러니까 말이야. 얼마 전에 이 놀이터에서 민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돼는 나 혼자만의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 깨달았어. 아빠와 그 여자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마음이.. 그 마음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러면 민수에게는 왜 복수를 하려고 했어? 복수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민수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던 건 나를 기억하지 못 했기 때문이야.”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복수를 하려고 했다는 게 이해가 안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응. 다른 이유는 없었어.” 소희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를 기억 못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 그런데 내가 생일에 초대한 것과 초콜릿 준 것까지 민수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나를 기억해냈다는 사실에 마음이 완전히 녹았어.”
 소희의 말에 솜이는 인간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기억을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복수를 결심하다니. 
 “기억을 못해서 많이 서운했을 것 같기는 해. 그래도 기억을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잔인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는 게 납득이 안돼. 물론 실현되기 어려운 복수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내가 사소한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면이 있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랑 아빠가 사이가 안 좋았어. 한번은 엄마랑 아빠가 거실에서 큰 소리를 내며 싸운 적이 있었어. 그때 나는 방에 있었고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 둘이 싸울 때마다 너무 무서웠어. 아빠가 그런 말을 했어. 당장 헤어지고 싶은데 아이들 때문에 못 헤어지는 거라고. 그랬더니 엄마가 나도 마찬가지라면서 소리를 질렀어.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 아니면 2학년이었을 거야. 그 소리를 듣고 엄마랑 아빠가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나만 없으면 엄마, 아빠가 저렇게 소리지르며 싸우는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침대에서 펑펑 울었어. 나는 엄마, 아빠를 불행하게 하는 존재이고 내가 없으면 엄마, 아빠는 저렇게 싸우지 않아도,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슬펐어. 엄마, 아빠는 내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을 거고 나는 무의미한 존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어. 계속 울고 있을 때 침대에 놓여있던 내가 좋아하는 큰 곰인형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어.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사실 너는 지구인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너는 잠시 지구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라고 했어. 나의 진짜 부모님은 지구에서 보이는 달 뒷면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어. 이 험난한 우주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위탁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거야. 그러면서 곰인형이 말하길 언젠가 너의 진짜 부모님은 너를 데리러 올 테니까 슬퍼하지도, 울 필요도 없다고 위로해 줬어. 그 위로는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됐어.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나는 내가 진짜 외계인이라고 믿었어. 당연히 커가면서 내가 외계인이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됐지. 내가 외계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난 후부터는 다시 엄마, 아빠에게 내가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누군가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도 의미 없는 존재인 거잖아. 어렸을 때 민수를 좋아했고 어렵게 용기내서 그 마음을 표현까지 했는데 민수의 기억 속에 내가 없다는 사실에 복수하고 싶었나 봐.”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럼 지금은 복수할 마음은 없어?”
 “응. 완전히 사라졌어. 아까 얘기했듯이 복수를 한다는 자체가 일종의 망상 같은 거였다는 걸 깨달았고 그 누구에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어.”
 솜이는 소희의 마음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복수를 하려했던 마음도, 복수를 하지 않기로 한 마음도 모두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에 고통이 서려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그러면 어렸을 때 언니한테 많이 의지를 했겠네.” 솜이가 말했다.
 “맞아. 정서적으로 언니한테 많이 의지를 했지. 그런데 그 당시 언니도 어린애였으니까. 언니도 엄마, 아빠가 싸우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겠어.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자마자 자기 살 길 찾아 바로 집을 떠났을 때 어찌나 서운하던지. 언니에게조차 버림받는 느낌이었어.” 
 “그랬구나. 조금 전에 산책로에 있는 그놈 얘기하면서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어. 그놈하고 나는 형제지간이야.”
 뜻밖의 사실에 소희는 놀랐다. “둘이 형제라고? 그렇구나. 몸에 있는 무늬가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했는데 생김새가 워낙 달라서 형제일 줄은 상상도 못했네.” 
 “같은 날 태어났어. 내가 그놈 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어.”
 “형제인데도 그렇게 못 살게 굴다니. 정말 나쁜 놈이다.”
 “여기 생태계에서 절대적인 일인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형제라도 가차없지. 그게 야생의 삶이야.”
 “그래도 그렇지. 형제라고 하니까 그놈의 행동에 더 화가 난다.”
 이렇게까지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이 날 소희는 자신의 내면 밑바닥에 뭉쳐 있는 커다란 응어리를 밖으로 다 쏟아낸 기분이었다. 속이 후련하다. 속이 후련한 만큼 알 수 없는 불안감도 들었다.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응어리가 풀렸듯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소희를 더 불안하게 만든 것은 솜이의 평소와 다른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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