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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10. 2023

한 밤에 놀이터에서 6

어느 날 밤. 소희와 민수가 집 앞 놀이터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다. 민수는 손에 들고 있던 캐리어에서 딸기 스무디 두 개 중 하나를 꺼내서 소희에게 건넸다. “오다가 카페에서 샀어.”
 “이런 거 사올 거면 뭐 좋아하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딸기 스무디 안 좋아해? 밤 늦게 커피는 아닌 것 같아서 이거 산 거야. 싫으면 내가 두개 다 먹을게.” 민수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나 딸기 스무디 좋아해. 그런데 이런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이 근처에서 친구랑 가볍게 술 한 잔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연락한 거야. 술도 깰 겸 조금 이따 집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마침 너희 아파트를 지나가는 중에 네 생각이 났어.” 
 "그랬구나. 별로 많이 마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나저나 과외는 어때?"
 "잘 하고 있어. 네 덕분에 용돈도 벌고 고마워. 이번 달 과외비 받으면 크게 한 번 쏠게."
 "처음 소개시켜 줬을 때도 맛있는 거 샀잖아. 뭘 또 크게 쏜다는 거야. 저기 말이야. 가르치는 학생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
 “학생 어머니? 좋으신 분 같아. 항상 친절하시고..” 
 “이상한 점은 없었어?”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민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상한 점? 글쎄, 소정이 어머니와는 소정이 공부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거든. 이상한 점이라..” 민수는 잠시 생각을 한다. “소정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고 이제 초등학교 막 들어간 애를 미대에 보내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건 유별난 거지 이상한 건 아닌 것 같고. 음.. 이상한 점은 전혀 못 느꼈는데. 품위 있고 교양 있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야. 그리고 상당한 미인이고. 예전에 진짜 예뻤을 것 같아. 소정이 아버지도 한 번 봤는데 좋으신 분 같았어. 사업한다고 들었는데 집 꾸며 놓은 것 보니까 돈도 잘 버는 듯해. 미인을 얻으려면 역시 돈이 많아야 하나? 두 분 나이차도 있어 보이던데 말이지. 하하하." 놀이터 주변을 감싸고 있는 어둠의 적막을 뚫고 민수의 웃음 소리가 퍼져 나간다.
 소희는 민수를 째려본다. 민수는 계속 웃다가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소희를 발견하고 웃음을 멈추었다. 민수의 웃음 소리 때문인지 솜이가 나타나서 두 사람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농담이야." 민수가 말했다.
 민수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괜한 농담을 한 것이 후회된다.
 "너 그 아줌마랑 뭐 있는 거 아냐? 예쁘네 어쩌네 하는 것이 좀 수상한데. 너도 좀 바람기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소희의 말에 민수가 놀란 표정으로 발끈한다. "뭐?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냥 예뻐서 예쁘다고 한 것 뿐이야. 소정이 학습 상담한 거 말고는 다른 얘기는 해본 적도 없어. 야, 무슨 그런 큰 일 날 소리를 하고 그래?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나도 농담한 거야. 하하." 이번에는 소희의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민수가 발끈하면서 말한다. "야! 그게 무슨 농담이야. 그리고 나 바람기 없어.”
 “미안해. 친구끼리 농담할 수도 있지 뭘 그래.” 소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농담이 아니었기에 장난기 있는 표정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민수가 차분한 투로 돌아와 말한다. “그나저나 소정이는 어떻게 알고 나한테 소개한 거야?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얘기한 거 보면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알려주면 안돼?"
 소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그 애 아버지가 우리 아빠야."
 소희의 말에 민수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다. 소희는 곁눈질로 놀라지 않은 민수의 모습을 확인한다. 아마 민수도 눈치는 채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 여자, 아빠 회사 직원이었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그러게 말이야." 민수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했다.
 "어렸을 때 아빠가 언니랑 나한테 항상 강조했던 게 뭔 줄 알아?"
 "뭔데?"
 "정직해라. 거짓말 하지 마라. 사람은 솔직해야 한다."
 "그러셨구나. 좋은 말씀이시네."
 "야, 좋기는 뭐가 좋은 말씀이냐? 그런 말을 우리한테 왜 했겠어? 자기가 맨날 거짓말 하니까 그런 거지. 본인이 거짓말을 많이 하니까 그걸 항상 강조했던 거야.”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정직함을 강조한다고?”
 “원래 사람 심리가 자신이 숨기고 싶은 모습을 감추려고 반대 면모를 겉으로 더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정직하다는 믿음이 있다면 굳이 정직해야 한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니까. 너는 어때? 거짓말 많이 하는 편이야?"
 “그렇게 물어보면 세상에 자신이 거짓말 많이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렇기는 하지만, 너는 어떤지 알고 싶어. 솔직히 말해줘.”
 ”거짓말을 안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필요에 따라 하기도 해. 내 생각에 세상에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거짓말로 위기를 넘길 수도 있고, 창피한 순간을 모면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솔직함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작은 거짓말이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잘 해. 인간은 자기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걸 끔찍이 싫어하고, 자신의 마음이 다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속이기도 하지. 그래서 때때로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을 왜곡해서 인지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싶은 것만 보면서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거짓말을 하는 게 인간이야. 이런 얘기를 하는 나도 예외는 아니고. 어떨 때는 알면서도 나에게 속아넘어가기도 해.”
 “너 생각보다 생각없이 사는 애는 아니구나.”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나 생각 엄청 많지. 삶에 대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소희가 입을 실쭉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구나. 몰랐네. 좀 사는 집 도련님이라서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지. 사실 나도 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누구나 그래. 솔직함과 거짓말 모두 우리 삶에 다 필요하고 생각해. 좋고 나쁘고 같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갖다 쓰는 도구일 뿐이야. 나는 거짓보다는 솔직함을 더 많이 쓰고 있어.”
 “왜 솔직함을 더 많이 쓰지?”
 “솔직함은 누군가에게 나란 사람에 대해 신뢰를 갖게 하는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이지. 한 마디로 솔직할 때 얻는 이득이 거짓말할 때 얻는 이득 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거야. 그리고 나 같은 경우 솔직할 때가 마음이 더 편하기도 하고.”
 “공감가는 말이야.”
 소희와 민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솜이는 그 주위를 계속 느릿느릿 돌다가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솜이가 나지막이 "야옹, 야옹"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소희와 민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솜이를 본다.
 "저 고양이 아까부터 우리 주위를 계속 어슬렁거리고 다니던데 이 근처에 사나 봐. 요즘은 길고양이들 중에 토실토실한 애들도 많던데 쟤는 좀 날렵하고 날카로워 보인다." 
 "이 놀이터 주변에 사는 고양이야. 사실 내 친구야. 이름은 솜이야."
 "친구? 이 근처에서 자주 만나서 안면이 있는 고양이구나. 그래서 우리 주변에 계속 머무르는 거였구나. 솜이라는 이름은 외모와 다르게 귀여운 걸."
 "순한 고양이야. 첫 인상이 그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귀여운 면이 많아."
 이때 솜이가 몇 번 울음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들은 소희는 솜이를 보며 눈을 찡긋한다.
 "너를 보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너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아. 배고파서 그런가? 먹이 준 적 있어?" 민수가 물었다.
 또 솜이가 몇 번 울음 소리를 냈다.
 "아니. 고양이 밥 주는 분들은 따로 있어. 혹시 너.." 소희가 말을 하다 말고 딸기 스무디를 마신다.
 소희가 말하다가 말자 궁금한듯 민수가 묻는다. "나 뭐?" 민수도 소희를 따라 손에 들고 있는 딸기 스무디를 길게 빨아 먹는다.
 "아.. 혹시 말이야. 초등학교 때.. 우리 같은 반일 때.. 내 생일에 내가 너 초대했는데, 기억나니?"
 "그럼 당연히 기억나지. 내 책상 서랍에 몰래 생일 초대장 넣어 두었던 거 기억나."
 소희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두 눈이 커졌다. 민수가 그걸 기억할 줄은 몰랐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기묘함은 마치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매서운 추위 속에서 떨고 있을 때 하늘에서 따뜻한 눈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눈이 피부에 닿으니 차갑고 딱딱하게 얼어붙어 깨질 것만 같던 몸을 사르르 녹여주는 그런 느낌이다. 
 "우리 도서관 앞에서 처음 봤을 때 너는 나를 전혀 기억 못 했잖아. 나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한다는 거야?"
 "무슨 소리야? 존재조차 몰랐던 건 아니고. 네가 어렸을 때와 많이 변하기도 했고 내가 눈썰미도 없어서 몰라봤던 거지. 지금은 키가 아주 큰 편인데 어렸을 때는 아주 작았고 예전 초등학교 때 얼굴이 지금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말이야. 그 순간에 기억을 못 했을 뿐이었어.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서서히 기억이 나던 걸. 생일 초대한 것도 기억이 나고 말이야."
 "그랬구나. 그러면 내 생일에 왜 안 왔어?" 쏘아붙이듯 소희가 물었다.
 "글쎄. 그때 너랑 말도 안 해봤잖아. 아마 어색해서 안 갔을 거야. 네가 초대장에 누구누구 온다고 적어 놓았던 것 같은데 다 여자 아이들이어서 나 혼자 남자인 것이 조금 뻘쭘하기도 했던 것 같고. 너 나한테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도 줬잖아."
 “정말? 내가 너한테 초콜릿을 줬다고? 그건 기억이 안나." 왜 그랬는지 소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응. 분명히 줬어. 어떻게 그걸 기억 못할 수가 있어?”
 "그러게 기억이 잘 안 나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니야?
 “아니야. 분명히 너도 줬어.”
 “그럼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그때 너를 좋아했나 보다."
 민수는 말없이 웃기만 한다. 
 "그런데 지금 너는 남자로 별로야. 모르는 여자한테 번호나 물어보고 말이지. 바람둥이 같이."
 "야야, 바람둥이 아니래도. 그런 이상한 소리할 거면 나 집에 갈래. 술도 다 깼는데. 다음주 목요일에 수업 끝나고 같이 저녁 먹자. 그리고 다 먹은 스무디 종이컵은 이리 줘. 내가 가다가 쓰레기통 있으면 버릴 게."
 소희와 민수는 다음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고, 소희는 남아서 솜이와 민수가 기억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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