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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7. 2023

한 밤에 놀이터에서 3

어느 날 밤. 소희는 그네에 앉아서 친구와 통화를 하고 전화를 막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고양이가 기계실 구조물 위에 엎드려 나른한 표정으로 소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대놓고 빤히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동안은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흘깃흘깃 눈길을 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다. 소희도 고양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서로가 서로를 쳐다봤다. 오늘은 거리를 많이 좁혀보겠다는 마음으로 소희는 고양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다가 그동안 허용됐던 거리보다 가까워지니 고양이는 경계하는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리에서 바로 일어섰다. 조금 더 다가가니 털을 세우고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듯한 울음소리를 낼 뿐만 아니라 살짝만 닿아도 얼굴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낸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고양이의 강력한 뜻을 존중하여 그네로 돌아가 앉았다. 잠시 후 고양이는 원래대로 배를 깔고 다시 엎드렸고 날카로운 눈빛도 거둬들였다. 
 “너도 나 알지? 아직 낯선 것 같은데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보자. 당연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자고.” 소희가 말했다.
 고양이는 아무런 대답도, 어떠한 반응도 없다. 무반응이 곧 긍정의 뜻이라고 소희는 해석했다. 소희는 고양이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은 경계하는 모습이 남아있지만 이날의 미묘한 공기와 오고 간 눈빛은 이전에 없던 교감을 처음으로 주고받은 그런 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고양이는 소희가 많이 편해졌다. 고양이가 편해진 것에 비해 소희가 오히려 더 조심하는 모양새다. 소희가 며칠을 조금씩 다가왔고 이제는 팔을 뻗으면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하지만 쓰다듬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로부터 상처가 있어 아직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거리를 유지하며 소희와 고양이는 만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희는 고양이를 솜이라고 불렀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마음만은 여리기에 솜이라는 이름이 잘 맞아 보였다. 그렇게 불리는 것이 고양이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소희는 솜이와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솜이는 언제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이다.
 
 어느 늦은 밤 놀이터에서 그네에 앉아 소희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전화가 걸리는 신호음이 들린다.
 “소희야.” 아버지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빠, 보내준 용돈 잘 받았어. 고마워.”
 “고맙기는 뭘.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해. 지금 집이야?”
 “아니, 집 앞 놀이터야. 엄마가 아빠하고 연락하는 거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와서 전화하는 거야.”
 “그렇구나.”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미안하면서도 씁쓸함이 느껴진다. “소미는 잘 지내? 소미한테도 용돈 보냈는데.”
 “언니는 직장 다니는데 뭐 하러 보내? 나야 아직 대학생이지만.”
 “그래도 이제 막 취업했고 독립까지 했으니까 아무래도 자기가 버는 걸로 부족하겠지.”
 “별 걱정을 다하네. 언니 연봉 많이 받거든. 그리고 언니는 아빠한테 연락도 안 하잖아.”
 “그러게 말이야. 얼마 전에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혹시나 발신자 확인하고 전화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끝내 오지 않았어. 아빠는 소미 이해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랬구나. 언니가 아빠 전화 안 받는 거 알잖아. 안 받을 거 알면서 뭐 하러 했어? 언니는 아빠 이해 못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이해해. 언니가 취업한지 얼마 안 돼서 바로 독립한 이유도 엄마 때문이잖아. 사람 들들 볶는 엄마 성격을 견디기 힘들어서 어떻게든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거든. 나는 아빠도 그런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봐.”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소희야,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사실 아빠 잘못이 커. 소미랑 너한테는 많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야.” 
 씩씩한 목소리로 소희가 말한다. “아빠, 걱정하지마. 나는 원래 엄마랑 잘 지내잖아. 그리고 엄마 요새 병원 열심히 다니면서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을 찾았어.”
 “그거 정말 다행이다.”
 소희가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말한다. “아 맞다. 민수 어때? 잘 하고 있어? 벌써 과외 시작한지 두 달은 된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어. 애 엄마가 아주 만족하던데. 소정이가 그 친구를 잘 따르고 열심히 배우려고 한데 기특하게도.”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민수 영어가 완전 네이티브이거든. 아빠 애가 몇 살이라고 했지?”
 “아빠 애가 뭐야? 전에 얘기했잖아. 이름이 소정이라고.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이야.”
 소희는 아빠가 재혼한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에 자신과 언니처럼 소자가 들어가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
 “1학년이면 어설프게 영어학원 보내는 것보다 한국어, 영어 모두 완벽하게 하는 사람한테 과외 받는 게 훨씬 낫지. 말하는 거는 원어민이랑 충분히 대화를 많이 해야 늘어. 학원은 그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 아빠도 알고 있지?”
 “맞아. 애 엄마 말에 의하면 단순히 말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영어로 사고하는 법을 알려준데. 얼마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소정이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어. 그 친구 아빠도 한 번 봤는데 키도 크고 잘 생겼던데. 같은 과 친구라고 했나?”
 “학교는 같은데 과는 달라. 초등학교 친구야. 5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걔가 아마 4학년 때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을 거야.”
 “외모도 훤칠하고 학교도 좋은데 다니네. 사귀는 사이이면 아빠한테 말을 안 했을 리가 없고 혹시 그 친구 좋아해?”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친구일 뿐이야.”
 “남녀 간에 친구가 어디 있어? 지금 남자친구 없으니까 잘 해봐. 너무 괜찮은 청년인 것 같아서 그래.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 보여.”
 “아빠! 자꾸 뭐라고 하는 거야? 나 민수한테 전혀 관심 없어.. 걔 날라리에다가 바람기까지 있는 것 같아. 나는 그런 스타일 딱 싫어해.” 소희는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눈에는 날라리처럼 안 보이고 멋지고 성실한 이미지였어. 그리고 바람기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아? 전혀 그래 보이지 않던데.”
 “주변 모든 사람들한테 친절하고 잘해주더라고.”
 “사람들한테 잘해주면 좋은 거지. 그게 왜 바람기가 있는 거야? 아빠는 비록 한 번 밖에 못 봤지만 아주 괜찮은 녀석으로 보였어. 아빠 느낌은 그래.”
 소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 몰라. 몰라. 어쨌든 내 눈에는 그래 보여. 자꾸 그런 소리할 거면 전화 끊자.”
 “네가 먼저 과외 선생님으로 소개한 걸 보면 마음 없지 않은 것 같고. 그리고 또 애 엄마 말로는 굉장히 바른 청년이라고 했어. 당장은 아니더라도 잘 한번..”
 “끊는다.”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체 소희는 가차없이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뭐 라는 거야. 한 번 봤다면서 뭘 안다고 잘 해보라는 거야. 그리고 바람둥이다 아니다, 자기가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나? 바람둥이는 바람둥이인지 아닌지 한 번에 알아보나 보네. 진짜 어이가 없네. 언제나 자기 멋대로라니까.” 소희는 혼잣말로 짜증을 쏟아낸다.
 한참 혼잣말을 하다 무심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자리에는 솜이가 소희를 지켜보고 있다. 소희는 흥분한 상태라 솜이가 온 것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소희는 반가움과 짜증이 뒤섞인 묘한 표정으로 말한다. “나 통화하는 거 들었어? 도대체 아빠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내 친구를 과외 선생님으로 소개시켜줬거든 그런데 걔랑 나를 엮으려고 하지 뭐야. 걔는 그냥 친구일 뿐인데 말이지. 내가 바람둥이 같다고 해도 아빠는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더라고. 한번 봤다면서 뭘 안다고 그러는 건지.”
 소희가 솜이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무슨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솜이는 아무 말이 없다. 솜이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솜이 또한 소희에게 다가갔고 몸을 틀어 자신의 꼬리가 소희의 정강이를 스쳐 지나가게 했다. 솜이의 행동에 소희는 깜짝 놀랐고 어떠한 말보다 꼬리가 스친 작은 스킨십이 더 큰 위로가 됐다. 소희는 조심스럽게 솜이의 등을 쓰다듬는다. 솜이는 경계심이나 불편한 기색 없이 가만히 있는다.
 “와아! 우리 정말 많이 친해졌다.” 소희가 환성을 지르며 말했다.
 소희와 솜이는 어둡고 적막한 놀이터에서 소소한 얘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솜이는 가로등 불빛이 비치지 않는 잔디밭의 어둠 속으로 살금살금 사라졌다. 솜이가 떠나자 소희도 바로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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