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3일 – 선아 1

by 킥더드림

1. 2021년 4월 3일 – 선아 1
마포의 한 아파트.
선아는 거실의 커튼을 옆으로 쭈욱 당겨서 연다. 커튼이 열리니 거실 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갑자기 늘어난 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선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커튼에서 떨어져 나온 먼지들이 햇빛을 타고 여기저기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선아는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맑고 시원한 오전 공기가 밀고 들어와 밤새 탁해진 거실 공기를 정화시킨다. 창문을 계속 열어 놓으니 약간 쌀쌀한 느낌이 든다. 화장실에서 6살된 아들 민호가 나온다.
“민호야, 양치하고 세수 다 했어?” 선아가 물었다.
“응 엄마.” 민호가 선아를 보며 웃으면서 답했다.
“혼자서도 잘하네. 감기 걸리면 안되니까. 얼른 옷 입자.”
선아는 민호의 손을 잡고 방으로 데리고가 옷을 입힌다. 옷을 다 입히고 난 후, 여러 벌의 옷과 속옷을 반듯하게 개켜서 가방에 넣는다.
“엄마도 같이 가면 안돼?” 민호가 몸을 흔들면서 선아에게 물었다.
“오늘 엄마가 중요한 약속 있어서 그래. 민호가 엄마 좀 이해해줘. 알았지?” 선아는 미안한 표정과 함께 민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고, 민호는 시무룩하게 고개만 끄덕인다.
“맞다. 민호야, 할아버지, 할머니께 어제 유치원에서 상 받은 거 말씀 드려 까먹지 말고. 그리고 할머니랑 자면 할머니 불편하실 수 있으니까 아빠랑 자고.”
상 받은 얘기를 하니까 민호의 표정이 밝아진다. 선아는 가방을 들고 안방으로 간다.
“당신 준비 다했어?” 남편 종원에게 물었다.
“응 나는 지금 나가면 되는데, 민호는 준비 끝났어?”
선아는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종원에게 건넨다.
“여기 당신하고 민호 옷이랑 속옷 다 챙겼어.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까, 민호 춥게 입히지 말고 따뜻하게 잘 챙겨.”
“알았어.” 종원은 선아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종원은 민호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가고, 민호는 고개를 돌려 웃으면서 선아에게 손을 힘차게 흔든다. 오늘은 남편과 아들이 압구정동 시댁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날이다. 거실 창문을 닫으며, 이번 주말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 써야겠다고 선아는 생각한다.

선아는 남편과 아들이 떠나고 1시간 정도 지난 후 친정에서 가지고 온 밑반찬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차려 먹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마른 행주로 싱크대의 물기를 닦는다. 물기가 남아 있지 않게 싱크대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닦고 또 닦는다. 물기가 말끔히 제거되고 반짝거리는 은빛 싱크대를 보니 마음이 편하다.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고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서재에 가서 요즘 읽고 있는 소설 무라타 사야카의 <살인출산>을 가지고 온다. 커피와 책을 들고 소파에 앉는다. 오전 보다 거실에 들어오는 햇살이 더욱 강하다. 선아는 화장대로 가서 선크림을 바르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살인출산>을 읽는다. 토요일 오후 집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너무 좋다. 하지만 혼자 만끽하고 있는 이 즐거움과 여유로움이 언제라도 깨질 수 있다는 이상한 불안감 또한 마음 한 켠에 있다. 남은 분량이 많지 않기도 했지만, 소설의 재미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금새 다 읽었다. 재미는 있지만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워낙 소재가 독특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작가는 어떻게 이러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만을 추구해온 나 같은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상상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에 10명의 아이를 낳으면, 자신이 원하는 한 사람을 살인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이 주어진다는 상상이 선아에게는 그저 놀랍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내가 이러한 상황에 놓이면 누구를 죽이고 싶어할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갑자기 화가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주말에 혼자 있다는 즐거움과 여유로움은 사라진다. 선아는 1년 전 바람을 피우다가 자신에게 걸린 남편 종원이 떠올랐다. 그 때를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증거로 그 여자와 주고받은 톡을 내미니, 종원은 순순히 인정을 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종원은 선아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자신이 쓰레기고, 개새끼고, 나쁜 놈이고, 잘못한 거 다 인정하는데, 선아와는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고 했다. 종원은 선아가 자신을 너무 숨막히게 해서 이렇게 살 바에는 이혼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는 논리를 폈다. 선아는 그 말을 듣고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서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선아는 그 길로 집을 나와 3일 동안 찜질방에서 지냈다. 도저히 친정에 갈 용기는 나지 않았고, 찜질방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3일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바람 핀 사람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지는 못할 망정 이혼을 요구한다는 것이 납득이 안됐다. 너무 화가 나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지만 아들 민호, 친정 부모님,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혼만은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혼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오점으로 남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혼을 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종원과 같은 조건의 남자를 다시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종원은 키가 크고, 잘 생겼고, 학벌도 좋고, 금융권에서 높은 연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시댁은 아주 부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물려받을 재산이 조금은 있다. 만약 시댁이 엄청난 부자면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윤택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아마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 대가로 자신의 자유 일부를 그들에게 헌납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봤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현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선아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런 차원에서 종원 집안의 경제력은 선아가 원하는 딱 적당한 정도의 수준이고, 거기에다 운이 좋게 시부모님은 인품이 좋은 사람들이다. 종원은 선아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는 그런 신랑감이었다. 선아는 대학 때부터 종원과 같은 조건의 남자를 찾기 위해 결혼 전까지 만남과 헤어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렇다고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것은 아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선아는 종원을 많이 사랑해서 결혼했다. 이 정도 조건의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는가, 경제적으로 어떠한 이득이 있는가, 앞으로 어린 아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가를 고려해봐도 이혼은 득보다는 실이 더 큰 손해보는 비즈니스임에 분명했다. 대기업에 다니고 있고 양육비까지 받으면 혼자서 아들을 키우는데 경제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 영위하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못한 삶이 될 게 뻔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어렵게 만들어 가고 있는 이상적인 삶이 무너지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선아는 종원에게 이혼 할 수 없다고 얘기했다. 선아가 이혼을 할 수 없다고 하니, 종원은 자신이 밉지 않냐며 왜 안 해주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지속적으로 이혼을 원했지만, 선아는 자신과 아들의 삶을 위해 이혼 요구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흘러 자연스럽게 그 사건을 서로 언급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었다. 관계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서로간의 서먹함도 사라졌다. 지금은 둘째를 가지려고 노력도 하고 있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선아 내면에 있는 분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냥 덮어두고 있을 뿐이다. <살인출산>처럼 누군가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하니, 선아는 남편 종원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남편을 죽이면 화풀이를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잃는 것이 더 많아 결국 후회하게 될 것 같다.’ 소설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상상을 계속한다.
‘남편이 내게 너무 큰 죄를 저질렀고 엄청난 고통을 주었으니 이 정도 상상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내면에 이 정도 사악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나?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는 나쁜 상상을 할 거다.’
종원이 바람 피운 과거가 떠올라 불쾌한 감정과 분노가 치밀기도 하지만, 소설에서처럼 누군가 한 명 죽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니 뭔지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내 안에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사악함이 존재하는 것 같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다. 인간은 현실화하기 불가능한 사악한 마음을 소설이나 영화에 투사하여 상상으로 배설하는 게 분명하다.’ 이런 생각을 하니 혼자 보내는 휴일의 즐거움과 여유로움이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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