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3일 – 미지 1

by 킥더드림

5. 2021년 4월 3일 – 미지 1
청담동의 한 아파트.
미지가 방에서 자고 있다. 커튼 사이로 가느다란 빛만 들어오고 있어 방안이 몹시 어둡다.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알람과 함께 핸드폰 화면도 켜진다. 알람 음악은 애니매이션 <카우보이 비밥> OST 중 <Walts for Zizi>이다. 느리고 잔잔한 왈츠 곡의 선율이 서서히 퍼져나가 고요한 방 안 구석구석을 채운다. 미지가 가끔 뒤척이면서 내는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음악에 더해진다. 음악이 다 끝나가고 있지만, 미지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있다. 갑자기 알람 음악이 끊기고, 전화벨이 울린다. 벨이 한참 울린 후에야,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미지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어 엄마.”
“오늘? 나 오늘 안 되는데. 이따가 오후에는 사무실에 잠깐 나가봐야 하고, 저녁에는 진서랑 선아 만나기로 했어. 내일 갈 수 있으면 갈게.”
“그럼 나야 잘 지내지. 윤서방도 뭐 잘 있어. 아빠랑 태준이도 별 일 없지?”
누워있던 미지는 일어나 앉는다.
“그래 다행이네. 그리고 엄마, 제발 부탁인데 내가 매달 보내주는 돈 아끼지 말고 다 써. 편하게 살자, 제발. 태준이 걱정도 조금 덜 하고.”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고요. 나는 건강 잘 챙기고 있어. 엄마, 나 중고등학교 때나 그렇게 잔소리 좀 해주지 그랬어? 지금은 내 앞가림 잘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내일 가게 되면 연락할게. 끊는다.”
전화를 끊고 미지는 잠시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다가 거실로 나왔다. 방과 달리 커튼이 완전히 열려 있는 거실은 환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거실에 있는 스탠드형 거울을 보니 얼굴은 조금 부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다. 거울에서 얼굴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미지는 턱에 난 작은 여드름을 발견한다. 눈에 거슬린다. 손가락으로 몇 번 눌러보니 미세한 통증이 느껴진다. 분명 어제 자기 전만 해도 못 본 것 같은데, 얼굴에 여드름이 나니 약간 짜증이 나고 신경이 쓰인다. 미지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1리터짜리 팩에 담긴 우유를 꺼내고, 식기 건조대에서 꽤 큰 그릇과 숟가락을 꺼내서 식탁으로 왔다. 부엌의 창밖에는 올림픽대로와 영동대교가 보인다. 미지는 식탁에 있던 시리얼을 먹을 만큼의 적당량 그릇에 쏟아 부었다. 그 위에 우유를 부었고, 무표정한 얼굴로 창 밖을 보면서 시리얼을 먹는다. ‘우웅’하며 돌아가는 냉장고의 미세한 기계음이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집안이 적막하다. 미지는 6개월전부터 남편과 별거 중이다.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별거하는 사실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유독 남편의 안부를 자주 묻는 것이 자신과 남편의 관계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어머니가 눈치를 챈 것 같다. 어머니가 알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미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미지는 1년 전 남편이 다른 남자와 연인 관계인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결혼 생활을 포함 남편을 알게 된지 10년이 넘었지만, 그가 바이섹슈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미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미지는 패션산업에서 일하면서 성적 소수자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을 잘 알아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이 그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패션업계는 없는 소문도 만들어내는 바닥이다. 업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미지에게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보가 된 느낌이 들었고 수치심도 컸다. 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미지 앞에서는 친절하고 교양 있는 태도를 보이지만, 뒤에서는 잘나가는 미지를 모함하거나 헐뜯기를 서슴지 않는다. 미지도 이러한 생리를 잘 알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웃는 느낌이 들어 죽고 싶은 심정이다. 차라리 빼어난 미모의 여자와 바람을 피웠으면 이렇게까지 비참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회사 지분을 매각하면서 맺은 계약에 미지와 미지의 남편이 공동대표직을 10년 동안 유지해야 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계약기간 동안 이혼도 하면 안 되는 조건이 있다. 계약 당시에는 남편과 사이가 좋았고, 또 기대보다 훨씬 큰 금액에 지분을 매각할 수 있는 기회여서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5년 이상을 함께 일해야 한다. 같이 살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실질적인 결혼관계는 끝이 났다. 그렇더라도 일은 같이 해야 하니까, 친구이기도 하고 사업파트너이기도 한 애매한 관계로 지금은 지내고 있다. 아직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철저하게 잘 살고 있는 부부인양 연기를 하고 있다. 미지는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척하면서 지내고 있지만, 사실은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돈을 많이 벌면 삶이 훨씬 더 즐거워질 거라 생각했고, 자신이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불안감도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번 지금의 삶은 기대했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미지가 처음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고등학교 때였다. 미지에게는 6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미지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동생이 자폐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지의 가족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이후로 집안 모든 일은 동생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미지의 어머니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하루 종일 동생을 돌 보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만큼 어머니는 미지에게는 신경을 덜 쓸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미지도 부모의 관심이 많이 필요한 어린 나이였고, 자신이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동생이 자폐증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다투었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일에만 매달리기 시작했고, 집에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서 부모님은 더 자주 더 크게 싸웠다. 동생의 몸은 계속 커갔지만, 정신은 몸의 성장을 따라오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울 때 마다 미지는 극도의 불안감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이 싸우면, 방에서 자신의 귀를 틀어 막고 있었다. 중학교에 가서는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방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크게 듣거나, 밖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이렇게 심리적으로 불안한 환경에서 자란 미지는 어릴 때부터 마음에 품고 있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친구이다. 안정감이 없는 집보다 밖이 편한 미지에게는 많은 친구가 필요했다. 어린 미지는 살기 위해서 친구들을 사귀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처음 보는 친구의 환심을 어떻게 사는지, 친구와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하는지, 무엇을 하면 친구들이 좋아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학창시절에 미지한테 친구는 목숨과도 같았다. 두 번째는 독립이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집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독립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지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주위 친구들이 보기에 미지가 아무 생각 없이 노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뉴욕에서 패션 공부를 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었다. 결혼도 빨리 하고 싶었다. 미지는 뉴욕에서 남편을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친한 지인만 모아두고 간소하게 식을 올렸고,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는 식을 올리고 나서 전화로만 알려드렸다. 마지막 세 번째는 돈이다. 부모님이 싸우는 이유의 대부분은 돈 문제였고, 그 때마다 두 분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다.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동생이 자폐증 판정을 받았는데, 원래는 아버지 사업이 자리 잡을 때까지 어머니가 직장에 다닐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면서 경제적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다. 반면 동생이 커 갈수록 동생에게 들어가는 교육비와 치료비는 더 많이 필요했다. 부모님이 싸우는 이유는 비단 돈뿐만은 아니었다. 두 분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힘든 것이 많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동생의 양육에는 관심도 없고 잘 도와주지도 않는 아버지에게 늘 불만이 많았다. 아버지는 사업을 일으켜 보려고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는 어머니에게 섭섭함이 컸다. 그런데 미지가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아버지의 사업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크게 번창했다. 갑자기 집안의 경제적인 사정이 좋아진 것이다. 아버지의 수입이 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님이 싸우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갈수록 두 분의 사이가 좋아졌다. 동생의 상태는 큰 호전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많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주말에 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미지는 항상 유학 갈 돈이 걱정이었지만, 아버지 사업이 잘 되면서 돈 걱정 없이 뉴욕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돈이 생기면서부터 집안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 보고 미지는 자신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보다 더 많이 벌겠노라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면 동생한테 빼앗긴 엄마의 사랑을 나눠가질 수 있고, 내면의 불안도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을 한 끝에 미지는 자신이 목표했던 모든 것을 이루었다. 돈과 명예를 다 얻었다. 하지만 내면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모른다. 그리고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그냥 알게 됐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건 돈이 근본적인 불안감을 해소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질적인 목표는 이루었지만, 정신적인 욕구는 해결되지가 않는다. 요즘 미지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모르겠고, 삶이 막막하기만 하다.

미지는 사무실에 가기 위해 집에서 나왔다. 회사는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회사로 가기 전에 1시간 정도 필라테스를 했다. 토요일 오후,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다. 미지는 최근 자신의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할 해외 아티스트를 찾고 있다. 자신의 브랜드를 매각한 직후 미지와 남편은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인수한 기업의 경영진은 기존에 볼 수 없는 파격적이고 과감한 디자인의 신규 의류브랜드를 만들길 원하고 있었다. 파격적이면서도 소비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컨셉과 디자인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지와 남편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국내 젊은 아티스트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같이 작업한 아티스트는 미지의 중고등학교 시절 동네 친구이자 무명 화가인 최정인이었다. 정인의 디자인은 너무 과감하고 지나치게 파격적이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그 디자인이 시장에서 새롭고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아서 신규 브랜드가 성공할 수 있었다. 정인은 미지와 함께한 콜라보레이션이 크게 성공하면서 하루 아침에 유명 작가로 발돋움 했다. 그 성공은 벌써 4년전 일이고, 미지는 그 때와 동일한 고민에 빠져있다. 미지는 자신의 직원들이 찾은 후보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컴퓨터로 보고 있다. 3시간 이상을 꼼꼼하게 살펴봤지만, 딱히 미지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티스트가 눈에 띄지 않는다. 올해 안에는 콜라보레이션 할 아티스트를 선정하고 계약까지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하다. 이미 해외에서 어느 정도 유명세가 있으면서도,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를 미지는 원하고 있다. 보고서를 보고 있으니, 직원들이 일하는 것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직접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미지는 artprice.com에 접속하여 2020년 작품 거래금액이 가장 큰 작가와 작품들부터 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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