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3일 – 미지 2

by 킥더드림

6. 2021년 4월 3일 – 미지 2
오늘은 고등학교 동창인 진서와 선아를 만나는 날이다. 선아와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고, 진서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고, 노는 친구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까지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진서와 선아는 공부를 매우 잘하는 친구였다. 그 많던 고등학교 친구들 중 지금 연락을 하고 있는 친구는 진서와 선아 뿐이다. 공부에 관심이 없는 놀던 친구들하고는 내가 유학을 가면서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뉴욕에 있을 때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수 차례 연락을 했지만, 아무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 친구들은 아무도 대학을 가지 못했다. 친구들이 일부러 나를 피한다는 생각에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고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그 친구들이 왜 나와 연락을 끊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진서와 선아는 나에게 너무 소중한 친구이다. 진서는 조용하고, 감정 표현이 없고, 다른 사람한테 무관심 했다. 그러다 보니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다. 진서는 시험을 볼 때 마다 전교 1,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 선아는 나에게 진서는 공부를 안 하는 척하는 것이 너무 얄밉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내가 보기에 진서는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공부하는 머리가 특별히 뛰어났던 것 같다. 선아와 달리 경쟁심도 없었다. 진서가 마음만 먹었으면 고등학교 내내 전교 1등을 단 한번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10대 여학생들은 외모를 가꾸는 것에 관심이 많은데 반해, 진서는 외모에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눈에 띄거나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꾸미고 관리를 하면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외모였다. 진서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무관심해 보였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별로 존재감이 없었지만, 나는 진서가 남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진서가 가지고 있는 무심하고 암울한 분위기에 끌려 친해지고 싶었다. 처음에는 사교성이 좋은 나도 지나치게 무뚝뚝한 진서에게 다가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첫 학기가 끝나갈 때 즈음, 나는 OO남자고등학교에 다니는 동네 친구인 정인을 통해 진서의 언니가 자살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진서에게 자폐증이 있는 동생 태준에 대해서 자주 얘기를 했다. 죽은 언니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가족에 대한 아픔이 공통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내가 동생 얘기를 하면 진서는 항상 담담하게 들어주었다. 내 얘기에 공감을 잘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진서는 자신의 언니 얘기를 한번도 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언니에 대해서 먼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도 진서는 언니에 대한 얘기는 한적이 없다. 진서랑 대화를 할 수록 진서는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감정이 결여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내가 진서에게 자주 말을 걸고 동생 얘기도 가끔 하면서 서서히 친해질 수 있었다. 진서가 의대를 간다고 했을 때, 고등학생의 시선으로도 다른 사람을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진서와 의사라는 직업은 맞지 않아 보였다. 나는 진서에게 왜 의대에 가려고 하는지 물었었다. 부모님이 원하기도 하고 자신은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서처럼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삶의 목표가 뚜렷하지 않고 또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서가 결혼할 때도 나는 그 사람 어디가 좋은지 물었었다. 진서는 부모님이 원하고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한다고 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냐고 물었다. 진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진서는 감정만 없는 것이 아니라 욕망도 거세되어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진서는 전문의를 따고 2년 정도 후에 병원을 그만두었고, 결혼 생활도 몇 달을 가지 못했다. 미국 유학을 갔다 와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관심이 없었기에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선아는 어디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친구였다. 선아는 공부만 잘 한 게 아니라, 얼굴도 아주 예뻤다. 그래서 주변 학교 남학생들한테 인기가 엄청 많았다.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선아가 공부에 집중 하느라 자주 놀지는 못 했지만, 중학교 때는 꽤 친하게 지냈고 선아의 집에도 가끔 놀러 갔었다. 선아의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그리고 선아에게는 세 살 많은 오빠가 있다. 오빠 또한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해 반포에서 꽤 유명했다. 중학교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선아의 어머니는 30대 같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고, 굉장히 미인인데다 스타일도 세련됐었다. 친구들과 선아의 집에 놀러 가면 어머니께서는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셨다. 동생한테만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는 우리 엄마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훌륭한 인품과 높은 교육 수준의 부모, 준수한 외모에 공부까지 잘하는 자식,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환경까지 선아의 집은 그야말로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해 보였다. 중산층 가정의 모범적인 표본과도 같았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당연히 선아는 성격이 밝고,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무엇이든 잘 하고,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선아가 유일하게 넘지 못하는 벽이 진서였다. 진서보다 공부를 잘하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진서가 두 번 시험을 잘 보면 꼭 선아가 한 번은 잘 봤었는데, 이상하게 그 패턴이 고등학교 3년 내내 반복이 되었다. 이런 패턴이 계속되자 선아는 공부로 진서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신이 나머지 모든 면에서는 진서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선아가 가진 모든 것을 부러워했다. 특히 화목한 집안 분위기가 제일 부러웠다. 그리고 지금도 선아가 부럽다. 선아의 남편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좋은 학교를 나와 금융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고 있다. 시댁도 돈이 많다고 들었다. 선아는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대기업에 다닌다. 선아 부부는 평균 보다 훨씬 높은 수입으로 멋진 라이프 스타일을 향유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6살된 아이가 있다. 엄마 아빠의 수려한 외모를 꼭 닮아 아이도 너무 예쁘다. 한 2년 전 즈음인가 나와 남편이 선아 집에 초대를 받아서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선아는 여전히 화목한 가정에서 살고 있었다. 너무 행복해 보였다. 당시 나는 임신이 잘 안돼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어서 선아가 더 부러웠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선아를 보면 내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한 때 선아를 심하게 질투한 적이 있었다. 선아를 질투 한 이유는 동네 친구였던 정인이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동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학생은 선아고, 남학생은 정인이었다. 정인은 잘 생기고 옷도 잘 입었다. 밝고 쾌활한 성격에 말도 잘하고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날라리 같은 느낌과 부잣집 아들 같은 분위기를 모두 가지고 있어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정인이를 혼자 좋아했다. 하지만 한번도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마음을 솔직히 표현했다가, 사이가 어색해지거나 친구 관계까지 깨지는 것이 두려웠다. 정인은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부터 좋은 대학을 가겠다며,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인이와 선아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둘이 동네 카페에서 함께 공부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나는 정인이를 선아에게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질투심이 불타 올랐다. 선아에게 정인이랑 사귀냐고 물어봤다. 선아는 아니라고 했다. 미대를 준비하던 정인이 그 동안 그림만 그리느라 공부에는 너무 소홀했다며 공부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해서 같이 공부를 하는 거라 했다. 정인이에게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선아는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남자마저 가질 수 있는지 질투가 하늘을 찔렀지만, 선아에게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정인이도 선아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유학을 갔고, 그 둘 모두 각자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질투는 잠시 그때뿐이었다.

미지는 진서와 선아를 서래마을에서 6시 7분에 만나기로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빠져있던 미지가 무심코 시계를 본다. 5시 11분이다. 토요일 저녁은 차가 막힐 수 있기 때문에 빨리 출발해야 한다. 하던 일을 얼른 마무리 짓고, 진서와 선아에게 줄 선물을 챙겨 사무실에서 나왔다. 미지는 사무실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후 길게 내뿜는다. 공기 중에서 담배 연기가 서서히 흩어진다.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도 담배 연기와 함께 사라지는 것 같다. 담배 한대를 다 피울 즈음 예약한 택시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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