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3일 – 진서 2

by 킥더드림

4. 2021년 4월 3일 – 진서 2
오늘은 고등학교 동창인 선아와 미지를 만나는 날이다. 선아와 미지는 같은 중학교를 나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고, 나는 두 친구를 고등학교에 와서 알게 됐다. 선아와의 첫 만남은 매우 특이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첫 시험에서 나는 전교 1등을 했다. 첫 시험 성적이 발표되고 난 후 나는 쉬는 시간에 옆에 앉은 친구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축하해.” 누군가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축하한다는 말에 무심코 몸을 돌렸더니, 선아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친구가 갑자기 축하한다며 악수를 하자고 하는 상황이 너무 낯설어 나는 선아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선아는 악수를 하지 않고 뭐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손을 내 몸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선아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내가 손을 잡자 선아는 팔을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었다.
“전교1등 축하해. 나는 5반 이선아야.”
“어 그.. 그래 고마워. 나는 김진서야.”
“네 이름 김진서 이미 알고 있어. 이번에는 네가 전교 1등 했지만, 다음 시험에는 내가 1등 할거니까. 기억해둬.” 선아의 표정과 말투는 매우 당찼다
“아 그렇구나. 그래 기억하고 있을게.”
“그래, 진심으로 축하해.” 선아는 다시 한번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선아가 가고 나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청소년 드라마 혹은 영화에나 나올만한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과 행동을 하는 선아를 보고 황당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전교 1등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저런 연기 같은 대사와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시험에서는 일부러 몇 문제를 틀렸다. 시험 결과 선아가 전교 1등을 하고 내가 2등을 했다. 그리고 또 선아가 쉬는 시간에 찾아왔다.
“나 약속 지켰다. 이번에는 네가 축하해줘.”하며 선아가 손을 내밀었다.
“어 그래 축하해! 정말로 1등했네.” 악수를 하면서 선아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래 고마워.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선아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선아와는 이런 이상한 대화를 나눈 것을 계기로 친해졌다. 그 이후로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선아가 나보다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내 점수를 의도적으로 조절했다. 나는 공부를 매우 잘 한 것을 제외하면, 별로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매우 조용한 편이었고 친구도 많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친구는 선아와 미지 밖에 없었다. 과묵하고 무뚝뚝한 성격에 말투도 퉁명스러워서 그랬는지 친구들이 다가오기 어려워했다. 그에 반해 선아는 공부도 잘 할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예뻐서 눈에 확연하게 띄는 친구였다. 선아와 친해지기를 원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성격이 활발한 선아는 여러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다. 그리고 선아는 우리학교 옆에 있는 OO남자고등학교에서 예쁜 걸로 유명했고 당연히 인기도 많았다. 공부도 잘하고 교우 관계도 좋다 보니 반 회장, 학생 회장은 늘 선아의 몫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아는 미술, 음악, 체육 등 예체능도 남들보다 잘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야 말로 욕심도 많고, 경쟁심도 크고, 인정욕구도 강한 친구였다. 거기다가 선아는 착하기까지 했다. 재수 없을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착한 선아를 미워하는 친구는 없었다. 단순히 모범적이다, 뛰어나다라는 말만으로 고등학교 때의 선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무언가 그 이상이었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가장 완벽한 학생 같은 느낌이 선아에게는 있었다. 그 당시 선아를 보면 우리 부모님이 좋아할 아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엄마, 아빠가 자식에게 바랬던 모든 것을 선아는 다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뛰어난 면이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공부까지 더 잘 하려 애쓰는 선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무슨 과목을 공부했는지, 몇 시에 자고 일어나는지 등에 대해서 늘 궁금해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줘도 내 말을 잘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미지는 소위 말하는 노는 친구였다. 성격이 매우 밝았고 친화력도 뛰어나 친구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노는 그런 친구는 아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영리하고 자기 주관이 뚜렷했다. 미지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람들의 장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점을 구체적으로 칭찬해서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지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나이에 비해 훨씬 어른스러웠다.
“진서야, 너는 대학교에 가면 지금보다 훨씬 아주 매우 빛이 날 거야.” 미지는 고등학교 때 나에게 이런 말을 가끔 했었다. 그리고 빛이 난다는 것을 과장되게 강조했다.
“고마워. 그런데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어. 뭐가 빛이 난다는 건지. 나는 변하지 않아. 내가 대학을 간다고 해도 혹은 가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의 나와 똑같을 거야.”
“야야, 네 말이 무슨 말인지 더 모르겠다. 고등학생이랑 대학생이랑 어떻게 똑같니?” 미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학생이라는 신분이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다르지 않..”
“야야 진서야! 존재고 지랄이고 그건 잘 모르겠고.. 내 말은 너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는 거야.”
“원석?”
“지금은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너는 대학 가면 훨씬 더 매력을 발산하게 될 거야. 두고 봐. 남들이 보지 못하는 너만의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매력이 나한테는 보인다니까. 지금보다 살도 좀 빼고 스타일을 바꾸면 훨씬 더 세련되고 묘한 매력을 풍길 수가 있어. 너는 키가 크니까 모델을 해도 될 거야. 거기다가 너 같이 얇은 쌍꺼풀에 가로로 긴 눈매는 신비함을 더해주거든.”
“모델? 키 크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는 아니잖아. 그리고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야. 너도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면 훨씬 더 매력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당시에 나는 그냥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좋은 말을 미지에게 했다.
그런데 미지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답을 해서 놀랬다. “나는 수능 안 보고 유학 갈 거야. 뉴욕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해서 유명한 디자이너가 될 거야. 그래서 나한테 학교 공부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아. 그냥 노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뉴욕 패션스쿨에 가기 위해서 이것저것 알아도 보고 있고 준비도 하고 있는 중이야. 나는 최대한 빨리 패션 산업에서 유명해지고 성공할거야. 돈도 많이 벌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될 거야. 모두가 알아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거야.”
미지는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삶의 목표가 분명했다. 처음에는 미지의 말이 좀 황당하게 들렸다. 하지만 미지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미지한테는 디자이너로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뛰어난 감각과 명석한 두뇌와 굳은 의지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방학에 미지를 만나러 뉴욕에 간 적이 있었다. 뉴욕에서 만났을 때 미지의 계획은 훨씬 더 구체화 되어있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성공한 모델이 뉴욕으로 진출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졸업하면 뉴욕에서 일을 하면서 그들이 뉴욕으로 잘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 두터운 친분을 쌓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을 통해 한국의 유명 연예인들과도 교류를 할 기회가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한국에 돌아와서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할 계획이고, 자신만의 독특한 컨셉의 디자인과 셀럽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키울 것이라고 미지는 말했다. 그리고 30대 중반에 자신의 브랜드를 대기업이나 다국적 기업에 매각해서 엄청나게 큰 돈을 벌 것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세웠던 목표를 대학에 와서 실질적으로 구체화하고 실행해 나가려는 미지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브랜드를 매각해서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자가 되겠다는 미지의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지가 뉴욕에서 했던 말을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뉴욕에서 만난 남편과 함께 브랜드를 론칭한 것을 제외하면, 미지는 내게 말했던 목표 그대로를 30대 초반에 다 이루었다. 오히려 자신이 목표했던 시기보다 더 빨리 해냈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미지에게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남동생이 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미지는 유독 나한테 동생 얘기를 자주 했다. 동생의 자폐증 상태가 어떤지, 특수학교는 어디를 다니는지, 어머니가 동생을 어떻게 돌보는지, 동생이랑 어떻게 놀아주는지 등에 대해서 자주 얘기를 했었고, 동생에게 어떤 변화가 있으면 꼭 나한테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폐증인 동생을 하루 종일 돌봐야 하는 어머니 걱정을 많이 했다. 미지가 동생 얘기를 할 때마다 잘 들어주고 적절한 반응도 했지만 사실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죽은 언니를 생각해도 슬픔을 못 느끼는 나였기에 미지 동생에 대한 얘기를 들어도 정서적으로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같이 걱정해주고 공감해주지 못한 것이 진심으로 미안하다.

진서는 선아와 미지를 서래마을에서 6시 7분에 만나기로 했다. 7분에 만나자고 해도 정확하게 그 시간에 모이는 경우가 없는데, 굳이 7분으로 약속을 정하는 미지의 장난이 진서는 이해가 안 된다. 선아와 미지를 한 두 달에 한번 정도 만난다. 이상하게 오늘 만남은 기대가 되고 설렌다.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복용 중이어서 술을 마시면 안 되지만 술이 마시고 싶다. 그래서 진서는 그냥 술을 마실 생각이다. 약속 장소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진서는 씻고 화장을 한 후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집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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