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3일- 진서 1

by 킥더드림

3. 2021년 4월 3일- 진서 1
반포의 한 아파트.
잠에서 깬 진서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넘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아, 처방 받은 수면제를 먹고 잤다. 그래서 그런지 머리가 몽롱하고 가벼운 두통이 있다. 회사를 그만 두고 일을 안 한지 6개월이 넘었기 때문에 토요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주말 같은 느낌은 전혀 없다. 방안의 커튼이 20센치미터 정도 열려있다. 열린 커튼 사이를 따라 빛이 오른쪽 사선 방향으로 들어와 장롱의 일부분을 커튼의 길이만큼 세로로 길게 비추고 있다. 진서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장롱을 비추고 있는 빛을 본다. 그 빛을 보고 있으니까 따뜻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 매우 낯설고 이상하다. 진서는 다리를 덮고 있는 이불을 힘있게 걷어내고, 침대에서 나와 방 안의 드레스룸을 지나 화장실로 갔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한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레스룸에서 청바지와 스웻셔츠로 갈아 입고 그 위에 경량 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왔다.

4월의 맑은 아침, 집 밖으로 나오니 머리카락이 조금 날릴 정도의 시원한 바람이 분다. 햇살이 강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쌀쌀하지 않아서 좋다. 한 달 전만해도 아파트 단지 내 화단에 있는 나무가 앙상했었는데, 지금은 나뭇가지에서 조금씩 새순이 올라오고 있다. 나뭇가지에 연두색 물감을 찍어놓은 것 같다. 봄이 오고 있다. 화단에는 이름 모를 꽃들도 피어 있다. 꽃 위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 다닌다. 진서는 꽃을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꽃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는 못 보고 지나간다. 나비는 진서 뒤로 따라 붙어 등 주변과 머리 위에서 잠시 날다가 다시 꽃밭으로 가버렸다. 주위를 보며 걷다 보니, 진서는 어느새 집 근처에 있는 빵집에 도착했다. 자동문 버튼을 누르니 문이 열리고 빵 굽는 냄새가 후각 신경을 강하게 자극한다. 이 동네에서는 꽤 크고 유명한 빵집이다. 토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빵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빵을 고르고 있고, 테이블에서 빵과 음료를 먹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파티셰는 갓 구운 빵을 가지고 나와 진열대에 올려 놓느라 바쁘다. 막 가져다 놓은 빵에서는 더욱 진한 향이 난다. 진서도 빵을 고르는 줄에 합류하여 빵 몇 개를 고르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포장한 빵과 커피를 들고 빵집을 나오니, 다시 강한 햇살이 느껴진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 왔던 길로 돌아간다.
‘몸이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졌다. 어떤 큰 변화가 내면에서 일어난 게 분명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랑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두 달 전에 난 교통사고 때문에 그런가?’
‘회사를 그만둔 것 보다는 교통사고 때문인 것 같다.’
‘감정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분명 사고 이후부터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감정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 생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진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진서는 포장한 빵과 커피를 식탁 위에 두고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고 온다. 아메리카노가 담긴 종이 컵의 뚜껑을 여니 김이 모락모락 난다. 진서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커피가 진하고 맛있다. 빵집에서 가지고 오는 동안 커피가 어느 정도 식어서 너무 뜨겁지 않고 적당하게 따뜻하다. 빵을 한 입 먹는다. 맛있다.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진서는 핸드폰에 깔려 있는 지상파 방송국 어플을 열어 라디오를 켠다. 잠시 후 남자 DJ 목소리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낮은 톤의 DJ 목소리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진서는 클래식 음악 방송이라 DJ가 일부러 저음으로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저는 아침 일찍 뉴스를 진행하기 때문에 항상 새벽에 출근하는데요.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에 나와 방송국으로 오기 위해서 강변도로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운전하고 있는데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 우리 청취자 분들은 아마 다 아실 거에요. 새벽에 동이 트는 모습이 얼마나 근사한지. 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워낙 맑아서 그런지, 동이 트고 난 후에도 달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아시죠? 새벽에 하얗게 보이는 달. 날이 밝았는데도 달이 또렷하게 보이니까 왠지 기분이 묘하고 신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달이 굉장히 예뻤어요. 오늘은 동이 트는 멋진 광경 보다 그 선명한 달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그 때 문득 우리 애청자 분들과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어떠신가요? 지금 12시를 막 넘겼는데 화창한 봄날에 월광소나타를 듣는다. 낮이라 안 어울릴 것 같나요? 제 생각에는 뭔가 아이러니하면서도 오늘 같은 날과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하하 그럼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2악장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재즈모음곡 2번 왈츠입니다.”
DJ가 음악을 소개하고 말을 멈추자, 아주 잠깐 진서의 집에는 빵 먹는 소리와 커피 마시는 소리만 들린다. 스피커에서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2악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진서는 볼륨을 조금 높였고 집안은 피아노 선율로 채워진다. 음악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진서의 눈앞에 섬광이 번쩍하면서 두통이 생긴다. 눈살이 찡그려질 정도의 통증이다. 그리고 베토벤의 월광소나타가 배경음악으로 쓰인 영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몇 장면이 진서의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막 떠오른다.

#1 파란 하늘이 보인다. #2 미국의 어느 작은 동네에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다. #3 개 한 마리가 어떤 소년을 보자 점프를 한다. #4 고등학교 운동장에 학생들이 지나다니고, 어떤 아이들은 미식축구를 한다. #5 학교 건물 안에서도 아이들이 분주하게 어디론가 가고 있다. #6 운동장과 학교 건물 안에서 지나다니는 아이들을 여러 관점에서 반복해서 보여 준다. #7 어떤 학생이 인터넷으로 총기를 구매한다. #8 학생 두 명이 총을 들고 학교로 간다. #9 두 학생은 학교 안으로 들어가 학생과 선생님을 향해 총을 쏜다. #10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총을 쏘는 두 학생을 피해 도망 다닌다. #11 컴퓨터 게임을 하듯 도망가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또 쏜다.

진서는 이러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지만 머릿속에서 영화 속 장면들이 계속해 떠오른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재즈모음곡 2번 왈츠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또 눈앞에 섬광이 번쩍거리고 머리가 아프다. 이번에는 스탠릭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 장면들이 떠오른다.

#1 여자가 옷을 갈아 입는다. #2 남자는 집안에서 턱시도를 입고 있다. #3 여자와 남자는 함께 파티에 간다. #4 의사인 남자는 파티에서 마약에 취해 쓰러진 어떤 여자를 치료해준다. #5 파티 다음날 남자는 여자에게 파티에서 혹시 다른 남자의 유혹을 받았는지 묻는다. 그리고 남자는 나는 당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6 남자의 믿는다는 말에 자극을 받은 여자는 지난번 휴가 때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본 해군장교랑 바람 피우는 상상을 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을 유혹했으면 가정을 버렸을 거라고 말한다. #7 남자가 치료하던 환자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8 죽은 환자의 집에 가니, 죽은 환자의 딸이 갑자기 남자를 유혹한다.진서는 라디오를 껐다. 라디오를 끄니 <아이즈 와이드 셧> 장면들이 떠오르는 것도 멈춘다. 어린 시절 피아노로 월광소나타를 치는 언니가 눈 앞에 보인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언니가 생각나니,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슬픈 감정이 올라온다. 기분이 우울해진다. 진서는 방에 가서 항우울제를 가지고 온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약 종이를 찢는다. 종이에 든 알약들을 입안에 털어 넣고 물과 함께 삼킨다. 남은 빵과 커피를 다 먹고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눕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누워서 1시간 정도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우울한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자신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약이 도대체 뭐라고 사람의 기분까지 좌지우지하는지 신기하다. 예전에는 언니가 생각나도 슬픈 감정이 들지 않았다. 진서는 지금처럼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드는 것이 싫지만은 않다. 그 이유는 이러한 감정을 예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서는 기쁨, 사랑, 슬픔,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오늘 오전 빵과 커피를 사러 갈 때처럼 햇살, 바람, 나무, 꽃, 빵 굽는 향 등을 감각적으로 음미해본 적 또한 없다. 그냥 그런 감정이나 느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만 있었지 진서에게는 감각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달 전 차를 폐차시킬 정도의 큰 교통사고를 당한 후 진서에게는 감정이 열리고 감각이 깨어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우울해지는 감정 변화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좋다. 마음에 인간다움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것 같다. 그리고 예전에는 없던 불안감도 생겼다. 진서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다. 지금까지는 그냥 주어진 대로 수용하면서 살았다면,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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