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3개월 후
서하는 지수와 미희를 만나 논현동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미희가 말한다. “얘들아, 짠 하자!”
셋은 건배를 하고 소주를 마신다.
서하가 지수를 보며 말한다. “지수야, 너 얼굴 좋아 보인다. 전에 봤을 때 보다 표정도 밝고 편해 보여.”
“그러게 얼굴 좋아졌어. 헤어진 남자친구는 잊었나 보네?” 미희가 물었다.
지수가 미희를 빤히 보며 말한다. “야, 그럼 다 잊었지. 그게 언제 적인데? 6개월도 넘었어.”
“벌써 그렇게 됐구나. 얼굴이 유난히 좋아 보여.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서하가 물었다.
“요즘 나 썸 타는 사람 있어. 전 남자친구랑은 비교도 안되게 괜찮은 사람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걔를 왜 좋아했는지조차 모르겠어.”
서하가 기뻐하며 묻는다. “오! 정말? 진짜 잘 됐다. 어떻게 만났어?”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아직 정식으로 사귀자는 말은 없었는데 곧 사귀게 될 거 같아.”
서하가 묻는다. “같은 건물에서 일한다면 회사는 다른데 너희 회사랑 그 사람 회사가 한 건물에 있다는 말이지?”
“응.” 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오가다 얼굴은 자주 볼 수 있어도 같이 일하거나 얘기할 수 있는 접점은 없었을 텐데.. 어떻게 연결이 된 거야? 보나마나 그 남자가 너 맘에 들어서 번호 물어 봤겠네.” 미희는 혼자 묻고 혼자 답했다.
“아니. 내가 먼저 번호 물어봤어.”
서하와 미희가 동시에 놀란다. “정말?”, “진짜? 너한테 그런 면이 있었어?”
미희가 지수를 보며 말한다. “너 진짜 용기가 대단하다. 정말 잘 됐다. 아직 사귀는 건 아니니까 저번에 바람 피운 그런 인간은 아닌지 잘 알아봐. 네가 너무 착해서 잘 당한다니까.”
서하가 미희를 툭 치며 말한다. “지수가 애도 아니고 잘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설마 또 그런 사람 만나겠냐?”
미희가 서하를 보며 말한다. “왜에? 나는 그냥 지수가 또 상처 받을까 봐 걱정 돼서 그러는 거야. 다른 뜻은 없어.”
지수가 어색하게 웃는다. “하하. 내가 알아서 잘 할테니 걱정들 마. 본격적으로 사귀게 되면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 그나저나 서하야, 넌 회사는 어때? 여전히 다니기 싫어? 아직도 회사 체질이 아니야?”
“야, 세상에 회사가 체질인 사람이 어디 있냐? 그냥 다니는 거지. 뉴다이내믹스 다니면서 회사 체질이 아니라고 하면 배부른 소리지.” 미희가 목소리 톤을 높여 말했다.
“응. 조직 생활은 나랑 안 맞는 거 같아. 사실은.. 회사 그만 둘까 생각 중이야. 지금은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못 그만두고. 그거 끝나면 그만 둘 수도 있을 거 같아.”
지수가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정말? 조직 생활을 싫어하는데 다른 회사로 옮기지는 않을 테고.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나 취미로 블로그에 글도 쓰고 일러스트로 그림도 그리잖아.”
지수가 말한다. “응. 그거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어. 내가 완전 네 팬이잖아. 그런데?”
“그걸 보고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 여행 에세이 내보자는 제안을 받았어. 글이랑 사진이랑 일러스트가 같이 담겨있는 여행 책을 내보자고 하더라고. 내 그림이랑 글이 마음에 들었나 봐.”
지수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말한다. “우아! 잘 됐다.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또 블로그 팔로우도 꽤 많잖아. 너랑 딱 맞는 거 같은데. 오! 윤서하, 이제 여행작가 되는 거야?”
미희가 조금 흥분한 톤으로 말한다. “얘가 얘가, 너 미쳤어? 좋은 직장 놔두고 뭐 하는 짓이야! 남들은 뉴다이내믹스 다니고 싶어도 못 다녀. 전업 작가로 먹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 거 같아? 야, 하지마. 정말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친구로서 난 반대야.”
미희의 무작정 하지 말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 서하는 친구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다.
“회사 당장 그만두고 전업으로 뛰어드는 건 위험하기는 하지. 책 낸다고 다 유명 작가가 되는 건 아니니까. 미희 말대로 책 낸 사람 중 전업 작가로 먹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맞는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도전해 보고 싶어. 도전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무언가를 이룬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서하의 말을 듣고 지수가 말한다. “난 서하 말이 맞는 거 같아. 서하는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니까 무모한 도전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회사 다니면서 모아둔 돈도 있을 거고, 퇴직금도 받을 거고, 그럼 당장 수입이 없어도 괜찮잖아.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봐. 혹시 잘 안 되더라도 서하 넌 능력이 있으니까 재취업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나는 서하 네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
서하가 웃으면서 말한다. “고마워. 지수야.”
미희는 지수의 말을 듣고 더 흥분한다. “야! 이지수, 너 애를 왜 부추겨? 너 잘 못 되면 네가 서하 인생 책임 질 거야? 나는 뭐 회사 체질이어서 다니냐? 좋아서 다녀?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서하야 너 정신 차려.”
지수도 다소 흥분해서 말한다. “내가 왜 서하 인생을 책임져. 잘 되든 못 되든 서하 자신의 책임이지. 다만 나는 서하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나는 현실에 안주해서 하고 싶은 거 있어도 못하고 살기 때문에 이런 서하의 용기가 진짜 부러워. 정말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 정말 잘 돼서 내 친구가 유명한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미희 너는 그런 생각 안 해? 왜 무조건 안 좋게만 말하는 거야? 나는 서하 능력을 아니까 하는 말이야.”
서하가 웃으면서 말한다. “하하. 별거 아닌 일로 왜 흥분하고 그래? 지수야, 고마워. 미희 뜻도 잘 알겠어. 유명한 작가가 되는 건 꿈도 꾸지 않아. 이 일을 계기로 프리랜서로 먹고 살 수만 있으면 좋겠어. 아직 출판사에 하겠다고 답을 주지 않았는데 마음은 어느 정도 기울어졌어.”
미희가 말한다. “지수야, 왜 이렇게 흥분해? 내 말을 좀 오해 했나 본데 나도 서하가 잘 됐으면 좋겠어. 나는 그냥 서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그러니까 흥분하지마.” 미희의 말에 지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미희가 계속 말한다. “아직 하겠다고 얘기 안 했다니 천만다행이네. 서하 너 진짜 잘 생각해라. 그냥 즐기면서 살아. 꿈은 그냥 취미로 하는 거야. 어쨌든 그건 네가 알아서 잘 하고 이제 내 얘기 좀 하자. 얘들아 나 이번에 차 계약했어.”
“정말? 오늘 타고 왔어?” 지수가 물었다.
“아니 일주일 전에 계약했고 차는 두 달 후에 나와. M모터의 AX7이야. 완전 자율주행도 되는 모델이야. 차 나오면 SNS에 이 차로 다 도배할 거야. 생각만해도 신나.”
지수가 말한다. “그 차 이번에 새로 나온 모델이잖아.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매달 나가는 돈이 장난 아니겠다.”
미희가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계약한 차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자랑한다.
사진을 보고 서하가 말한다. “예쁘다. 그런데 이 차가 그렇게 비싼 차야?”
지수가 대답한다. “응. 완전 비싸. 우리 같은 월급쟁이가 사기 부담스러운 차야. 하기야 서하는 차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지.”
“응. 나는 처음 봤어. 차 이름이 뭐라고?”
미희가 소주 한잔을 비우고 발끈한다. “어떻게 너는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게 없냐? 좋은 차를 봐도 좋은지 모르고 말이야. 너는 우리 중에 돈도 제일 잘 버는 애가 차 한 대 사라. 네가 작가는 무슨 작가야. 그냥 회사 열심히 다니고 우리랑 즐겁게 놀아. 인생이 다 그런 거야. 뭐 별거 있어?”
미희의 말에 기분이 언짢은 서하는 소주 한 잔을 단 숨에 비웠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수가 서하의 눈치를 보면 말한다. “미희야, 너 또 왜 그래? 차에 관심 없을 수도 있지.”
“자기만 고고한 척 하잖아. 야! 누구는 꿈 없어? 꿈 없냐고? 아주 혼자 잘 났어 그냥.” 미희는 혀가 꼬인 채 말하고 있다.
“서하가 언제 고고한 척 했다고 그래. 너 많이 취했다. 안 되겠다. 그만 일어나자.”
술집에서 나와 서하와 지수는 많이 취한 미희를 먼저 택시에 태워 보냈다. 서하와 지수도 각자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가는 중 지수에게 전화가 온다.
“서하야, 잘 들어가고 있어?”
“응. 잘 들어가고 있지. 너는?”
“너 타고나서 나도 바로 택시 탔어. 미희가 가끔 저러지만, 오늘 따라 유난히 심하네. 원래 저런 애니까 너무 신경 쓰지마. 지금 하고 있다는 프로젝트는 언제까지 하는 거야?”
“3개월 정도 남았어.”
“아직 좀 시간 있네. 천천히 잘 생각해 봐. 나는 네가 도전해봐도 좋을 거 같아. 너는 분명히 잘 할 거야.”
“고마워 지수야. 네 말이 큰 힘이 되네.”
“그럼. 잘 들어가고 다음에는 우리 둘이 보자. 밉상 미희 빼고.. 진짜 왜 저러는지 몰라.”
“좋았어. 완전 좋은 생각이야. 복수하는 의미로 다음에는 우리 둘만 보자. 잘 들어가고 또 연락하자.”
서하가 씻고 나왔더니 오늘은 메이가 따뜻한 홍차를 탁자 위에 놓아 두었다.
“메이, 고마워. 잘 마실게.”
“오늘도 미희님이 기분 안 좋은 말을 했나 보군요. 서하님 표정에 다 써있습니다.”
“맞아. 오늘 기분 진짜 안 좋았어. 네 말대로 이제부터는 미희랑 거리를 둘 거야. 당분간 안 만나려고.”
“제 말은 만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정서적으로 거리감을 두라고 한 거였습니다. 미희님이 신의를 저버리더라도 상처를 받지 않게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정서적으로 조금 밀어내기 위해서 당분간 안 만나려고 하는 거야. 내가 출판사에서 제안 받은 거 얘기했거든. 그래서 회사 그만 두려고 생각 중이라고 했더니, 글쎄 미희가 제안 받은 거 하지 말라는 거 있지. 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냥 회사나 다니라지 뭐야! 네가 뭐 대단한 줄 아냐고 혼자 잘 난 척한다는 식으로 나를 막 몰아 부쳤어. 그 얘기 듣고 진짜 기분 나빴어. 지는 별것도 없으면 허세만 부리는 주제에.. 뭘 잘 났다고 이래라 저래라 그러는 건지. 메이 네가 사람 제대로 봤어. 나쁜 애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맞는 거 같아. 네가 사람 보는 눈이 나보다 낫다.”
“서하님, 화 많이 나셨군요. 지수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지수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어. 회사를 그만두고 하는 건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지만 좋은 기회인 거 같다고 말해 줬어. 내가 딱 듣고 싶었던 말이야.”
“그랬군요.”
“메이, 네 생각은 어때?”
“제 생각은 반드시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인데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서하님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안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들은 서하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저 높은 곳으로 갈까 봐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은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남들도 안 하길 바랄 뿐입니다. 비단 미희님뿐만 아니라 인간은 그냥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미희님 말에 상처 받지도 말고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설마, 미희가 그렇게까지.. 그나저나 나 잘 되겠지?”
“저도 잘 될지, 잘 안 될지는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서하님은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도전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메이랑 지수 말 들으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미희 때문에 짜증났어. 그리고 차 새로 계약했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나 차 안 사는 거 가지고도 나한테 막 뭐라고 했어. 혼자만 똑똑한 척 한다고 그랬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하여간 그런 비슷한 말을 계속 했어. 생각만해도 열 받고 짜증나네. 나한테 기분 나쁜 말을 끊임없이 하더라고 글쎄. 아주 열등감 덩어리라니까. 새로 산 차 나오면 어디다 갖다 박았으면 좋겠어.”
“서하님! 아무리 미희님이 거리를 둬야 할 사람이라도 교통사고가 나면 안 됩니다. 저도 미희님이 서하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거 매우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교통사고는 위험합니다. 교통사고는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사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사고입니다.”
미희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한다.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 미희가 하도 얄미워서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났으면 하는 거야. 5km 정도 속도로 가다가 다른 차랑 부딪치면 아주 쌤통일 거 같다는 거지. 그 정도면 사람은 다치지 않고 차만 좀 찌그러지겠지.”
“네. 그런 뜻이었군요. 서하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 미희님은 나쁩니다.”
“본성은 착하고 원래 나쁜 애는 아닌데, 오늘은 좀 나빴어. 많이 나빴어. 내가 제대로 복수해 주겠어.” 서하는 홍차가 담긴 컵을 입술에 갖다 댄 후 눈매를 매섭게 만들면서 말했다.
서하의 그런 모습을 메이가 빤히 쳐다본다.
“어쨌든 메이도 나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거 응원한다는 거지?”
“당연히 응원합니다. 서하님은 잘 할 수 있습니다.”
“고마워. 메이랑 얘기하고 나니까 속이 많이 시원해지고 후련해졌어.” 서하가 스마트폰에서 시간을 확인한다. “많이 늦었다. 내일 또 출근하려면 자야겠다.”
서하는 침실로 들어갔고 메이는 충전하려고 자신을 전원에 연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