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인연이라는 말의 의미
오랫동안 절친했던 A가 있었다. 취향이나 일상을 자주 공유하던 A는 어느 날부터인가 나에게 미적지근해졌다. 약속을 몇 달 후로 미루거나 내 연락에 몇 시간이 있어야 답을 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답을 하기는 했지만 나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나도 서서히 지쳐갔다. 먼저 연락해야만 나에게 답하는 A에게 자존심이 상하고 서운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알고 보니 다른 곳에서 직장을 다니게 된 A에게는 새롭게 친해진 무리가 생긴 것 같았다. SNS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환하게 웃는 A의 사진을 발견하고 나서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자존심을 버리고 가볍게 몇 번 더 만남을 시도했지만, 그 만남도 멀어져 가는 우리 사이를 다시 이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다 결국에는 연락이 끊겼다.
우리의 관계가 미적지근하게 끊어져 가는 기간 동안 생각했다. 아무리 친한 무리들이 새로 생겼다지만 우리가 그렇게 쉽게 멀어질 관계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A와 나와의 관계에 이토록 미적지근해진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A와 멀어져 가는 동안,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이후에도 머릿속으로 한참 동안 이유를 찾아 헤맸다.
내가 A를 질리게 할 만한 행동을 했던 것일까. 혹시 나도 모르게 잘난 척이라도 했던가?
그날의 내 행동이 A에게 너무 성의 없어 보였던 적이 있었나.
내가 너무 이기적인 친구였던 걸까?
내가 A에게 매력이 없는 친구여서 그런 것 아닐까.
그래, 애초부터 나에게는 A가 베스트였지만 A에게는 내가 베스트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해.
이렇게 친했던 사람과 멀어지는 것을 보니 내 성격이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몰라.
생각과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결핍의 경험을 겪은 화가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그는 이상 성격자인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어머니와 누이도 그가 어렸을 때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자신도 허약했기에 잦은 병치레를 치르며 성장했다. 성장 과정의 영향 때문인지 그는 평생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고통과 광기, 불안을 표현하는 작가로 남았다.
아무래도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은 1893년작 <절규> 일 것이다. 불안감과 공포에 떨며 절규하는 한 남자의 모습, 그를 둘러싼 핏빛의 하늘과 검푸른 해안선, 남자의 동요하는 마음처럼 굽이치는 곡선과 그를 가로지르는 직선. 뭉크는 인생에서 겪은 수많은 절망과 불안을 하나의 작품 안에 강렬하게 담아냈다.
'절규'만큼 뭉크의 감정이 절절하게 드러난 작품이 1896년에 제작된 '이별(Separation)'이라는 그림이다. 작품의 배경을 바닷가다. 남자와 여자는 한 공간에 있지만 이미 여자는 남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흰 옷을 입은 그녀는 긴 머리칼을 날리며 남자에게서 떠나려 하고 있다. 나무 등에 기댄 남자는 절망의 색인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그의 가슴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그의 앞에 자라고 있는 식물은 남자의 피와 같은 검붉은 색을 띠고 있다.
뭉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의 사랑을 경험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자유분방한 후원자의 부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 대한 의심과 질투에 시달린 경험을 했다. 고향 후배와 연애를 할 때에는 그녀가 다른 예술가와 삼각관계에 빠져 뭉크를 떠나버렸다. 상류층 여성과 사랑에 빠졌지만 예전의 연애에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뭉크는 그녀와의 결혼에 실패했다. 자아가 닫힌 뭉크는 사랑과 연대에 회의적인 인간형이 되어갔다. 결국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별의 절절한 아픔을 작품으로 녹여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검은색 옷을 입은 남성의 모습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별에 마음이 아파 심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남성의 상실감이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림을 다시 보았을 때에는 흰 옷을 입고 떠나가는 여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여성은 지금 왜 남자를 떠나가고 있는 것일까? 그림에서 우리는 어떠한 답도 얻어낼 수 없다. 남성의 괴로움에 찬 표정과 달리 여성의 얼굴에는 얼굴 생김새나 표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정을 알 수 없어 무심해 보이는- 때로는 섬뜩하게까지 보이는 - 여자의 얼굴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림 속 남자를 다시 본다. 남자는 왜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이별에 슬퍼할까. 이별이 남자를, 그리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본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상실감' 일 것이다. 떠나가는 사람이 나에게 너무도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나에게서 멀어지면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했다는 슬픔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우리는 보통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가치를 재어본다. 가까웠던 사람에게 더 이상 내가 중요한 존재가 아님을 느낄 때,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가 내동댕이 쳐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상대에게 고작 이 정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이 느낌을 더 이상 갖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상대방이 떠나간 원인을 찾아 헤매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은 왜 나를 떠나가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 그 사람에게 형편없는 존재였을까. 한참 이유를 생각하다 진실은 알게 되지 못하고 분노나 원망, 자책만 커질 때도 있다. 생각의 흐름이 되려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다.
'구독'과 '좋아요'는 보고 싶고, 사랑한다는 뜻이야
여섯 살 난 아이가 말했다. 최근 들어 유튜브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이런 말을 한다. 아이의 말을 듣고서야 '구독'과 '좋아요'는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유튜브뿐 아니라 sns에도 구독 또는 팔로우라는 기능이 있다. '앞으로 너의 채널을, 너의 콘텐츠를 관심 있게 지켜보겠다'는 말이다. 온라인에서 너와의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의미다. 현실 속에도 '구독'과 '좋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고 계속 보고 싶으면 그 사람을 구독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구독'과 '좋아요'가 사랑이라면 구독 취소는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을 '구독'하기 시작할 때 이유는 단순하다.
너에게 관심이 생겨서. 너와 재미있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서. 너의 일상을 알고 싶어서
반면 구독을 취소할 때는 이유가 실로 다양할 수 있고, 반대로 별다른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상대에 대한 무관심일 수도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에 관심이 쏠려서일 수도 있다. 더 자주 보고 싶은 채널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다. 모든 이유가 겹겹이 쌓이거나 섞여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구독취소를 누를 때 치명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콘텐츠가 치가 떨리게 싫거나 보기 싫어져 구독을 끊을 수도 있지만, 의외로 별 이유 없이 관심이 옮겨가거나 그저 싫증이 느껴져 구독을 취소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일방적으로 '구독 취소'를 당한다 느껴질 때, 우리는 보통 그 이유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해본다. 인간은 무엇이든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A가 나에게 멀어져 갈 때 나는 그 이유를 주로 나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했다. 왜 나에게서 멀어졌을까. 내가 별로였던 것일까. 나를 한없이 재어보았다. A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했던 잘잘못을 따져보았다. 내가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한참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SNS나 유튜브에서 엄청난 노력을 들인 콘텐츠만 사랑하지 않듯이 노력과 성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노력한다고 해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멀어져 가는 인간관계를 붙잡고 그 이유를 찾아 헤매는 것은 오히려 나의 상처를 더하게 만들 수 있다. 내 매력이나 사고방식이 상대에게 더 이상 먹히지 않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사람에게 매력 없는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흘러가는 인간관계 속에 만났다 헤어진다. 가까웠던 사람도 한순간에 멀어질 수 있다. 굳이 내 탓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상대방의 구독취소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 이유를 끊임없이 살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나의 잘못을 따져보거나 내 콘텐츠의 부실함을 재어보고 괴로워하는 것은 상처만 더해갈 수 있는 일이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마음에서 피를 흘리는 경우도 생긴다. 상대를 떠나보내기 위한 마음속 애도를 하는 과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별개로 인연이 멀어지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한 가지 이유가 한 가지 결과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도 가끔 생긴다. 상대가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오히려 상처가 곪아가는 것보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 용어의 하나로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인연에 시절이 한정되어 있다는 말은 인간관계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씁쓸하고 슬픈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가까웠던 시절에 나누었던 인연과의 추억을 강조하는 말도 된다. A와의 관계는 상처로 끝났지만, 어쨌든 친했던 그 시절의 나에게 많은 영향과 즐거움을 주었다. 그것으로 A와의 관계는 제 역할을 다 한 셈이다. 이제는 생각에서 놓아줄 때가 되었다.
인간관계의 시작과 끝은 계획한 대로 노력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매력이나 노력, 인간관계 방식에 따라 좌우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람이 나에게 구독취소를 누른 이유를 깊이 오랫동안 생각하지 말자. 세상에는 잠시 스쳐가는 인연도 존재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