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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un 23. 2020

타인의 말에 쉽게 상처 받고  
휘둘리는 이유  

 누군가의 말에 꾸준히 속상하고 서럽다면 먼저 살펴봐야 할 것  

사소한 지적에도 마음이 흔들린 날  


너는 대체 혼자 할 수 있는 게 뭐야. 내가 다 도와줘야 되네


아주 사소한 지적이었다. 낡은 현관문을 재빨리 열쇠로 열지 못하는 중이었다. 한국의 편리한 도어록과 달리 이 나라의 현관문은 낡고 다루기 어려웠다. 서투른 내 모습을 보며 남편이 한숨을 내쉬며 내뱉은 말이었다.

  

 사소하고도 짧은 말 한마디에 나는 폭발하였다. 남편에게 곧장 반박했다. "한국에서는 은행업무, 행정서류 떼는 사소한 것까지 전부 내가 했었다"부터 "나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냐"는 말까지 골고루 남편에게 쏟아부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3~4일은 이런 사소한 일로 남편에게 화를 내고 눈물을 흘리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싸움을 계속하던 어느 날 깨달았다. 한국에서였다면 남편이 똑같은 말을 했더라도 피식 웃으며 넘겼을 것이다. 남편이 나의 행동을 놀리거나 핀잔을 주는 방식으로 말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했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매번 발끈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의 나는 사회에서 나름대로 내 역할이 있었고 남편 외에도 대화를 나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휘둘린 적은 거의 없었다.

 남편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나를 그토록 화나게 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 중심에 남편이 있었기에 남편의 작은 말 한마디에도 한없이 흔들린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항상 남편을 탓하고 있었다. 아무런 인맥 없이 24시간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를 돌보며 지내던 시간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나의 소외감과 외로움을 배우자인 남편이 왜 이해해주지 못할까 생각했다. 서러운 마음에 자주 울기도 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남편 역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역시 낯선 타국에 와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으며 병원이나 은행에 가서 영어에 서툰 아내 대신 많은 일들을 해내야 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각자의 직업에 충실한 상태로 생활했었다. 나름대로 완충지대인 양가 부모님과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 와서 서로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했고, 육아, 이사 등의 일들을 오로지 부부끼리 해결해야 했다. 잦은 충돌이 일어났다.   


 그렇게 흔들린 날, 마음 상태를 관찰해보았다. 밑바닥에는 자격지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실제로 이 나라에서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고 남편에게 물리적, 심리적으로 의존해있는 상태였다. 남편이나 아이와 떨어져 혼자 있는 시간도 전혀 없었다. 내 행동이나 말의 유일한 피드백 상대가 남편이었기에 더 크게 그의 말에 휘둘렸다.  

 남편에게 '내가 이 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마음이 약해져 있고 자존감이 떨어져 있다'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나의 가장 허약한 부분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 대신 남편이 하는 말이 나의 허약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찌르면 크게 상처 받고 화를 냈다. 자기 방어였다.


 그러다 갑자기 남편이 무심코 던진 말들을 끊임없이 복기하며 속상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의 중심에 배우자를 놓고 과도한 기대를 하거나 서운해하는 행동을 멈춰야 했다. 남편이 아닌 '나'를 마음의 중심에 세워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내 마음을 먼저 돌보아야 했다.



자신감이란 이런 것,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낭만주의 경향이 미술계를 강타하던 19세기, 이단아처럼 나타난 화가가 있었다.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는 농촌의 비참함이나 노동자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작가였다. 실재하는 현실을 변형하지 않고 개관적으로 그림에 담는 '사실주의'의 시작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자화상>(구스타브 쿠르베, 1848-1849)

 


쿠르베는 괴짜로도 유명했다. 그의 독특한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1854)라는 그림이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1854, 구스타브 쿠르베)

 

 작품 속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사람이 쿠르베 자신이다. 턱수염을 기르고 조금 남루해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짐은 화구가 들어있는 가방이다. 그에 비해 쿠르베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를 청하고 있는 인물의 옷차림은 화려하다. 상류층의 모습을 갖춘 그는 쿠르베의 후원자였던 알프레도 브뤼야스였다. 브뤼야스는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재력가로, 쿠르베뿐 아니라 당대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사들이고 후원한 인물이었다. 그림은 쿠르베가 몽펠리에에 와서 후원자인 브뤼야스를 만나 인사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브뤼야스의 왼쪽에는 그의 집사가 고개를 숙여 쿠르베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브뤼야스 역시 그의 모자를 벗어 쿠르베에게 예의를 표하는 중이다.


그에 반해 쿠르베는 어떠한가. 초라한 옷차림에 비해 그의 태도는 한없이 당당하다. 그의 고개는 한껏 올라가다 못해 뒤로 젖혀져 있고 표정 역시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돈을 대주는 후원자를 대하는 태도라 보기에는 다소 거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그림의 부제는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富)'다. 돈 없고 초라해 보이지만 후원자 앞에서도 당당한 예술가인 자신을 표현한 작품이다.  


 쿠르베는 실제 모든 행동에서 자신감에 차있는 화가였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자신의 그림 전시가 심사위원에 의해 거절당하자, 보란 듯이 박람회 전람회장 근처에 임시 건물을 지어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의 작품들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종교화나 초상화, 풍경화나 풍속화가 아니었다. 예술가로서의 그가 그렸던 것은 평범한 현실의 장면들이었다. 그가 그린 작품들은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냈다.



 한 마디 말에 상처 받고 있다면 돌아봐야 할 것 

  

 쿠르베는 과도한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거만한 태도를 지녔던 화가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쿠르베에게는 예술가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당당함이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나 상황을 받아들일 때 그의 사고방식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었다. 어디에도 쉽게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러한 태도가 웬만한 일에 상처 받거나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부모님이나 직장상사, 배우자, 친구의 말에 계속 상처를 받고 있다면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폭력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언사 때문에 속이 상한 것이라면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딱히 그럴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상대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내가 상처받는 경우가 존재한다. 상대방에게 일일이 잘못을 지적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런 때에는 마음속 우선순위가 '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라는 존재가 내 마음속에서 너무 작아져 있어서 다른 이들의 말에 계속 속이 상하고 휘둘리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람이 내 마음속 우선순위에 있다면 얼른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심리적 거리두기를 할 필요가 있다(물리적 거리두기가 더 나을 수도 있으나 대체로 가까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 마음을 살펴보거나, 홀로 몰두하고 집중할 수 있는 취미나 일, 과제를 찾아보는 편이 낫다. 다른 사람의 말에 크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나를 중심에 세우면 타인의 말에 크게 속이 상하지 않게 된다. 라디오를 크게 틀면 주변의 소음이 잘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말투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보다 차라리 그 방법이 빠를 수 있다. 


 이제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코로나 때문에 24시간 붙어 있는 시기에는 상처 주는 말을 서로 내뱉는 일도 간혹 있지만 그럴 때는 차라리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한다. 남편의 양해를 구해 잠깐 동안 노트북을 가지고 나가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커피숍은 바이러스 때문에 가기 힘든 시기가 되었으므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차에 가서 글을 써본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집에 돌아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힘들거나 육아에 지칠 때에는 혼자 나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다.


 어차피 남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타인이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 역시 무리다. 그에 비해 내 마음을 스스로 돌보거나, 마음 속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타인의 말로 인해 서러움과 상처를 계속 간직하고 있다가는 화병만 커질 수 있다. 내 마음속에서 그 사람의 순위를 조금 내리고 내 마음을 살펴보며 평안을 꾀하는 것도 나름대로 현명한 방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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