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선생 Aug 18. 2020

가족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먼저다

우리를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는 사람 중 으뜸은 가족입니다

이 마음이 사라질 수 있을까 


몇 년 전 한국에 여름휴가를 갔을 때였다. 남편은 시댁에 있고 나는 친정에 얹혀 지내고 있었다. 지금보다 어렸던 아이가 수시로 울고 짜증을 냈다. 피곤한 데다 밤낮이 바뀌어 힘든 모양이었다. 아이의 기질도 어릴 때의 날 닮아 예민한 편이었다. 아이의 짜증을 달래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울음소리에 가장 크게 화가 난 것은 친정아빠였다. 다혈질인 아빠는 내게 "애를 왜 저따위로 키웠냐"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내 가슴속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나의 어릴 적 일화를 우연히 들은 후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빽빽 울어대는 나 때문에 화가 난 아빠는 나를 혼자 집에 버려두고 언니만 데리고 외출해버렸다. 뒤늦게 돌아온 엄마가 집에서 홀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속에 분명한 충격이 있었다. 집에 혼자 남겨진 아이가 울어대는 광경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아이를 향한 아빠의 짜증을 듣는 순간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나의 기질을 빼닮은 내 아이가, 어린 시절 홀로 집에 남겨졌을 나와 오버랩되었다. 아빠를 향해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 질렀다. 아빠가 손주 중 내 아이를 각별히 여긴다는 사실도 소용없었다. 그저 미움과 분노가 머릿속에 차올랐다.


 어릴 적 내게 아빠는 항상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어느 순간에 화를 낼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주로 엄마에게 그 분노가 향했다. 가장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그토록 화내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되도록 모른 체하는 한편, 아이들을 키워내기 위해 노력했다. 어린 나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는 엄마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가끔 엄마가 도망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언니와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두려운 상상이었다. 철이 든 이후에는 되도록 엄마의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이 되려 노력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도 하였다. 집안에 사위들이 들어오고 각종 대소사를 치르며 그래도 가족의 외형은 그럭저럭 갖춘다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에 대한 냉담한 내 태도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남편은 가끔 아버지에게 좀 살갑게 굴고 관심을 가지라고 타일렀다. 어린 시절의 일로 아직도 아빠를 원망할 필요가 있냐고도 이야기했다. 지극히 착한 남자의 지극히 착한 조언에 울컥하는 나를 발견했다. "정상가족이라는 수식어에 들어맞는 가정에서 자란 네가 도대체 뭘 알아. 내 지난 시간을 네가 알아?" 남편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의 100% 착한 의도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이가 들고 갈수록 부드러워지는 아빠를 보며 나도 복잡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냉담함에 아빠는 종종 외로워했다. 아빠를 향한 연민, 죄책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을 떠돌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 형성된 아빠를 향한 미움이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어떻게 아빠는 긴 세월 가족들에게 그토록 고통을 안겨주었을까 생각했다. '나의 비뚤어진 성격도 부모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라는 생각에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감정의 화살표는 결국 나를 향했다. 가족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못나고 예민한 내 탓인 건가 의문이 들었다.



그는 왜 인간을 혐오했을까, 에드가 드가 

  

 에드가 드가(Edgar De gas.1834~1917)는 무용수를 그린 그림들로 유명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다. 무용 연습을 하거나 무대 위에 오른 발레리나의 그림을 많이 남겨 '무희의 화가'라 불리기도 한다.  

에드가 드가(Edgar De gas, 1834~1917) @출처: 위키미디어

 

 드가가 그린 발레리나의 몸짓은 얼핏 보기에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여성 무용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의 생김새나 눈동자가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가 그린 무용수 근처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신사들을 발견할 때도 있다. 당시의 발레리나들은 상류층 여성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노동계층 출신의 10대 여성들이었다. 대부분이 가난을 벗고 부와 명성을 쌓기 위해 무용수의 길로 접어든 이들이었다.

 

 발레리나의 후원자로 나선 상류층 남성들도 있었다. 이때 무용수와 후원자 사이에는 성 상납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후원자들에게는 자신이 후원하는 무용수의 모습을 무대 안쪽에서 참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드가가 그린 무용수 근처의 남성들은 대부분 이 후원자들이다. 드가는 아름다운 발레의 세계만 표현하지 않았다. 그 세계 어두운 이면 역시 포착하여 작품 속에 녹여냈다.  

<스타>(1876~1877. 에드가 드가)  @ 출처: 위키피디아


  사실 드가는 냉소적이고 까다로운 성격과 인간 혐오증의 소유자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혐오하는 주요 대상 중 하나는 여성이었다. "여자의 수다를 들어주느니, 차라리 울어대는 양 떼들과 함께 있는 게 낫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다. 드가는 화가 에두아르 마네 부부의 그림을 그려서 선물하기도 했는데, 부인의 얼굴을 흉측하게 표현하여 마네가 그 부분을 찢어버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드가가 그린 '마네와 마네 부인의 초상'(1869) 마네 부인의 얼굴 부분이 칼로 찢겨 있다.  @ 출처: 위키미디어

 

 그의 여성 혐오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어린 시절 겪은 어머니의 외도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드가는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유럽계 인종과 다른 인종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인 크레올 출신이었다. 특별한 매력을 지녔던 어머니가 다른 사람과 외도를 한 것을 알게 되면서 그의 집안은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버지는 이를 묵인하고 넘어가려 했으나 어머니는 결국 드가가 13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 역시 점차 무너져 갔다. 드가의 여성 혐오증 역시 어린 시절 비극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가족도 상처가 될 수 있다 


 드가의 이야기를 접하고 처음에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여성 혐오증이었다던 그는 여성 무용수들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그림을 그려낸 것일까. 그의 여성 혐오증에 어머니의 영향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한 인간의 성격까지 바꿔버릴 수 있을까. 수많은 궁금증이 머릿속에 떠오르다 마지막 질문은 나에게로 향했다. 아빠에게 느끼는 미움과 원망이 나의 성격과 인생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까.  



우리를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는 사람 중 으뜸은 가족입니다.
보통 가족은, 옆에 없으면 그립고
가족과 함께 있으면 혼자 있고 싶을 때가 더 많지요.
가족과 함께 있으면, 대체로 짜증이 납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어느 날, 인터넷에서 이 글귀를 발견했다. 한 심리 상담사 분이 sns에 올린 글의 일부였다. 갑작스럽게 마주친 이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아, 가족은 항상 화목하고 힘이 되며 위로를 해주는 존재인 것만은 아니구나.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겠구나.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주었다. "어떻게 가족이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어?"라는 마음속 말이 조금씩 거두어졌다.

 

 세상에는 행복한 가족도 많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안겨주는 가족들도 충분히 많다. 겉보기에 정상적인 가족으로 보이는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다. 자존감을 깎아먹는 부모의 발언과 차별에 상처 받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사춘기 아이가 내뱉는 말에 상처 받는 부모도 있다. 배우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이들도 존재한다. 가족 역시 '내'가 아니라 타인이며, 가족관계도 인간관계의 일종이기 때문이리라. 나와 내 가족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그 깨달음이 묘한 위로를 주었다.


  이 글에 위로가 되는 말이 더 있었다. 나 스스로 납득하기 어렵거나 싫은 내 성격 중 많은 부분은 누가 나를 잘못 키웠거나 부당한 대우를 당했기 때문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었다. 성격의 대부분은 랜덤 하게 유전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 나의 예민함이나 비뚤어진 성격 중 많은 부분이 어린 시절 부모의 양육 때문에 오는 것이라 생각하며 억울해했다. 그러나 타고난 기질의 영향력도 크다니 억울함이 조금 거두어졌다.

 

  깊이 생각해보면 드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인간 혐오가 반드시 엄마와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 다른 경험들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높다. 드가가 항상 여성을 혐오하는 방식의 태도만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무용수를 자신의 친구에게 도와달라 부탁하기도 했고, 그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도 가끔 보였다. 부모와의 양육방식이나 경험으로 인해 한 인간의 성격이나 행동양식이 완벽하게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자신의 의지로 그 영향권을 벗어난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움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어떻게 그 영향권을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았다. 아빠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가장 바깥에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감싼 포장지를 몇 꺼풀 벗겨내 보았다. 그 포장지 가장 안쪽에는 어린 시절 내 마음이 있었다. 사랑받고 싶었고, 마음껏 어리광 부리고 싶었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마음의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는 그런 내가 있었다.  '사랑을 갈구하는 것=어리광=허약하고 미숙한 것'이라 생각해 애써 피해온 감정이었다. 직면하면 내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까 애써 피해온 마음들이었다. 깊숙이 숨겨놓았던 감정들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약간 편안해졌다.

 

주변을 살펴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의젓하고 착한 모습으로 포장지를 선택한 이도 있었고, 화와 분노로 상처를 감싼 이도 있었다. 끊임없는 성취나 인정 욕구로 마음을 포장한 사람도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주로 '냉소'나 '회피'라는 포장지로 마음을 감싼 채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이 깊숙이 숨어있었다.


가족이니까 덮어놓고 이해하고 용서하라는 말에 나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가족도 상처가 될 수 있다. 피를 나눈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이 주는 상처가 치유되고, 용서가 가능하다는 논리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미움이라는 감정 속에 숨겨진 내 마음을 먼저 알아주고 보듬는 것이 먼저다. 아직도 이기적인 탓인지 나는 내 마음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가족에 대한 미움을 거두는 것, 이해와 용서는 그다음이다. 상처 난 마음을 보듬고 내 상태가 편안해지는 것이 먼저다. 애쓰고 살아온 나를 내가 알아주고 안아주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닐까. 

 상처 준 가족을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이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미움의 영향권을 벗어나 당신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먼저다. 이해와 용서는 그다음에야 논할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이 먼저다.

 

 

 

이전 02화 상대방의 '읽씹'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