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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ug 11. 2020

상대방의 '읽씹'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당신의 상상력은 때로 독이 된다

카톡 대화 옆 1이라는 숫자에 민감해질 때  


이상하다. 분명 내가 보낸 카톡 문자 옆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진 지 1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상대방은 답이 없다. 얘가 왜 답이 없지? 바쁜 건가, 내가 너무 오랜만에 답을 보냈나. 요즘 우리 사이가 좀 소원했었나.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었나. 이 사람한테 내가 귀찮은 존재가 된 건가. 일명 '읽고 씹는다'는 읽씹에 내가 당한 건가.  


 상대방이 내 문자에 한참 답이 없을 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물론 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관계가 좀 흔들거린다는 생각이 들거나, 이 관계에 대한 자신감이 좀 떨어질 때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때는 또 있다. 가령 상대방이 바쁜 일이 있다며 나와의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피할 때도 그렇다. 만남을 가졌는데 상대방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내내 좋지 않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상대방의 카톡 문자나 표정을 해석하고 곱씹어보며 우리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를 되돌아보게 되는 때도 있다. 


 타인의 표정에 가장 민감했던 시기는 초임교사로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들을 데리고 아침 조회를 하면 절반 가량은 표정이 어둡거나 불만에 차있는 것처럼 보였다. "학생들이 단체로 날 싫어하나." "내가 하는 말이 고깝게 들리는 건가." 오만가지 생각에 아침에 깨어날 때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교실에 들어가기 조금 두려울 때도 있었다. 사춘기 아이들 특유의 표정이 그렇다는 것, 나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 아니라 다른 일로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후에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아이들의 불만에 찬 표정과 말투에도 아주 약간, 의연해지게 되었다. 물론 완전히 의연해지기는 어려웠지만. 



오셀로는 왜 데스데모나를 죽였을까 


영국의 거장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와 그가 쓴 오셀로의 극본    

 <오셀로>는 영국의 거장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다. 주인공 오셀로는 베니스의 무어인 장군으로 그에게는 아름답고 젊은 아내 데스데모나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셀로의 부하 이아고라는 악역이 등장하며 비극이 시작된다. 이아고는 자신을 신임하지 않고 카시오를 부관으로 택한 오셀로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오셀로에게 카시오와 데스데모나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이간질한다. 처음에는 이아고의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던 오셀로는 점차 교활한 이아고의 간계에 넘어가 아내를 의심하고 질투하다 우발적으로 그녀를 죽이기에 이른다. 후에 이아고의 죄가 밝혀지나 오셀로는 자신의 어리석은 질투심에 자책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1829. 알렉산드르 마리 콜린)     @ 출처: 위키피디아

 위 그림은 프랑스의 화가 알렉산드르 마리 콜린(Alexandre-Marie Colin. 1798~1875)이 그린 <오셀로와 데스데모나>(1829)다. 아내를 우발적으로 죽인 오셀로가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오셀로의 당황한 눈빛은 방금 자신이 죽인, 축 늘어진 아내의 모습을 향하고 있다. 가슴에 댄 손은 그의 비참한 심정을 드러낸다. 놀라고 당황한 가운데에도 이 남자는 비극의 근본 원인을 가늠해보고 있는 듯하다. 

  

 비극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제1의 원인은 악역 이아고의 교활한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아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의를 가지고 오셀로를 속이고 파멸시키려 한다. 생각해보면 이아고는 '나쁜 놈'이었을 뿐 아니라 영악하기도 했다. 오셀로의 가장 허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 부분을 파고들며 비극을 불러일으켰다.

 

  오셀로는 전쟁에 큰 공을 세운 용감한 장군이었으나 백인 사회의 이방인이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체 높은 원로원 의원의 딸 데스데모나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열등감이 마음속에서 완벽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이아고가 두 사람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하자, 그의 마음속 열등감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엉뚱한 상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결국 이야기의 끝은 참혹한 비극이었다. 

 


지나친 상상력은 독이 될 수 있다  


오셀로를 파멸시키기 위해 움직인 것은 이아고였다. 그러나 정작 오셀로를 파멸시킨 것은 명백히 말해 오셀로 자신이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상과 의심과 질투가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상황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때로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기도 하는 법이다.  


 이런 상황의 가장 나쁜 예는 주로 이성관계에서 일어난다. 언젠가 김형경 작가는 자신의 저서 <사람 풍경>에서 질투란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 없음'이라 정의했다. 자기 존중감이 부족한 사람이 가상의 경쟁자를 설정하여 환상 속에서 경쟁하는 것이 질투라는 것이다. 질투는 상대방을 괴롭히고 의심하는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 남녀 사이가 아닐지라도 불필요한 상상력이 인간관계에 독이 되는 일은 종종 있다. 

 

  가끔 상대방의 사소한 거절에 민감해지고 표정을 살피게 된다. 짧은 문자 안에, 상대의 얼굴에 숨은 속내를 가늠해본다.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도 있다. 처음에는 이 사람에게 힘든 일이 있나 걱정하다가, 점점 이 관계에 대한 상대방의 생각이 무엇일까 상상해보게 되고, 마침내는 상대방에게 내 존재가치가 얼마큼인지를 따져보기도 한다. 이미 한참 멀어진 관계인데 나만 눈치 없이 이 관계에 매달리고 있는 건가. 날 무시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은 여지없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뚝 떨어져 있을 때였다. 


 그토록 민감하게 눈치를 살펴서 내가 얻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뜯어보면 나는 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이 관계에서 버림 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이미 멀어진 관계에서 눈치 없이 나만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 게다가 나는 전형적인 회피형 인간이다. '상대방이 놓기 전에 이 관계에서 내가 먼저 손을 놓겠다'는 결심을 자주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대의 눈치를 살피고 상처 받지 않겠다는 다짐이 강할수록 그 관계는 더욱 흔들거렸다는 사실이다. 눈치를 살핀다고 해서 상대를 더 깊게 이해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상처를 받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과도한 상상력을 발휘하다 내가 먼저 상대방의 손을 놓아버리는 때도 있었다. 오히려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해지기로 했다. 그 편이 나의 정신건강에도 좋았다. 상대방이 내 문자에 답을 안 하거나 만남을 미룰 때에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보다 '바쁘겠지' 내지는 '최근에 안 좋은 일이 있었겠지' 생각한다. 사춘기인 학생의 표정이 좋지 않아도 '다른 일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어.' 라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해야 상대방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고 이해할 용기가 생겼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해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상대의 반응을 통해 내 존재가치를 가늠해 보는 일이 그것이었다. 상대가 나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냈다고 해서 내 존재가치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두 가지는 엄연히 별개의 것이었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라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자아의식을 쌓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부정적인 반응에 내 존재가치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도리어 내가 나를 상처 입히는 일이었다. 건강한 관계를 해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상상력은 인간의 사고에 있어 필수요소다. 사람이 다른 이의 입장에 공감하고 서로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상상력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가끔 지나친 상상력은 독이 될 수도 있다. 단순함이 명쾌한 약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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