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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May 28. 2020

인간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  

모두와 오랫동안 친구가 되어 지낼 수도, 필요도 없었다

모두와 친구가 되어야 할까  


낯선 중동 국가에 처음 정착할 때, 남편은 나에게 한국인 여성들 - 대다수는 남편을 따라온 주재원 와이프들이었다 -과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 그들과 친하게 지내야 육아나 이 곳의 생활 정보를 많이 알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아마도 본인한테 물리적으로, 심적으로 계속 의지하며 외로워하는 내가 안쓰럽고 한편으로 부담스럽기도 했으리라.

 

온라인 상에서 우연히 알게 된 아이 엄마들은 대다수가 좋은 사람이었다. 이 곳의 생활 정보를 세심히 알려주었고 친절했다. 그러나 분명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모임을 가졌지만, 취향이나 이야깃거리도 달랐고 남편의 직장 상황이나 아이를 기르는 상황도 다들 조금씩 달랐다. 미묘한 기싸움도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상황도 힘겨웠기에 나는 차츰 그들과 연락을 끊고 만나지 않았다. 물론 그분들에게도 나보다 먼저 맺은 인간관계가 있었기에 굳이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후로 나는 이 곳에서 오랫동안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다. 처음에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비수와 같은 말을 나에게 꽂아댔다.


 "넌 여기서 친구도 못 사귀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에도, 직장생활을 할 때도 나는 대체로 무리에 속하는 편이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사람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고, 사람을 사귀고 지속하는 것에 큰 노력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이 곳에서의 인간관계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전공이나 직업, 성향에 공통점이 없는 이들과, 아이를 키우는 외로운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만나 모임을 가져야 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일부러 약속을 잡아야 했고, 주로 아이 양육과 생활 정보에 관련된 이야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참기 힘들었다. 차라리 혼자되는 편을 택하기도 했다. 이곳 사회에서 나의 존재감이 워낙 미미하다 보니 사람들도 나와  굳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남편이 물었다.


"너 왜 요즘에는 그 00 엄마와는 만나지 않아? 이제 그 사람이랑 친하지 않나 보구나."


지극히 관계 지향적인 남편의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애초부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 있을 때야 비로소 제대로 충전이 되는 사람이다. 아무리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다지만 나는 여전히 나였다. 취향이나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외롭다는 사실만으로 인맥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맞지도 않는 누군가를 억지로 만나야 한다고?


솔직히 인정하자면 나도 외로웠다. 외로움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맞지 않는 사람과, 또는 이미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 사람과 친구로 지내기 위해 계속 고군분투해야 했을까.   



맞지 않는 마음의 거리, 고흐와 고갱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이야기를 꺼내본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화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함께 기거한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 될 것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고흐와 고갱의 관계가 처음에는 괜찮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미술에 대한 견해 차이가 차츰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이런 견해 차이는 같은 인물을 다른 분위기로 그린 두 점의 초상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지누 부인은 아를에서 카페 드 라 가르(Cafe de la Gare)를 운영하던 여인이었다. 고흐는 자신이 아를에 정착하도록 도와준 지누 부인에게 고마움을 담아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

지누 부인의 초상(반 고흐, 1888~1889)  @ wikimedia

 

 고흐가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 속에서 그녀는 품위 있는 옷을 입고 테이블에 턱을 괸 채로 앉아 있다. 부인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책이다. 책을 펼쳐 들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긴 지누 부인의 모습은 교양과 품위를 갖추고 있다. 고흐가 지누 부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이다.

아를의 밤의 카페(폴 고갱, 1888)   @ wikiart

 고갱도 지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누 부인의 모습을 그렸다. 같은 인물인데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고갱이 그린 초상화에서 지누 부인은 싸구려 술인 압생트와 술잔을 그렸다. 똑같이 턱을 괴고 있는 포즈인데도 둥그스름한 코와 턱선, 다소 불그스레해 보이는 모습이 흔한 술집 여주인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림의 제목에도 지누 부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다. 고갱은 이 작품에 <아를의 밤의 카페>라는 제목을 지어주었다. 밤의 카페답게 지누 부인의 뒷 배경에 술에 뻗어 테이블에 엎드린 이들과 흥청망청 술을 마시는 이들이 있다. 이들 무리 속에는 고흐의 지인이던 우체부 조셉 룰랭이 있다. 고갱은 고흐의 주변인을 대놓고 무시하며 호색한처럼 표현했다.


 두 작품 속에 더 깊은 사연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고흐와 고갱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생각에 차이가 있었고, 이 때문에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공동생활의 시작부터 분열의 조짐은 있었다. 애초부터 고갱은 기거할 곳이 필요했고 재정적으로 도움이 필요했기에 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돈이 모이면 자신이 원하던 열대 지방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고흐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처음 이 동거 생활을 시작할 때 화가들만의 공동체 생활에 이상이 있었다. 고갱과 예술적 발전을 함께 꿈꾸며 오랫동안 공동생활을 지속할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나 달랐던 고흐와 고갱이었다. 고흐는 이상주의자였고 고갱은 다소 냉소적인 인물이었다. 고흐는 자연과 교감하며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작품을 그리는데 힘썼고 고갱은 상상을 통한 자연의 재조합을 중시했다.  세계관과 화풍이 달랐던 두 사람은 결국 두 달간의 동거생활을 파국으로 끝냈다.  고흐는 고갱과의 다툼 후에 정신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



누군가와 맞지 않아 마음이 아플 때   

  

 고흐와 고갱은 모두가 독창적인 화법으로 훌륭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역사에 남았다. 그림에 대한 열정에도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맞지 않았다. 맞지 않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더 이상의 이유도, 누구의 탓도 필요 없다. 그 관계에 대한 미련을 놓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오히려 괴로워졌고, 특히 이 관계에 이상과 집착이 심했던 고흐에게 더 큰 타격이 왔다.


 가끔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생각이 미묘하게 달라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세상에 대한 견해나 취향이 달라서 누군가와 맞지 않을 때도 있다. 예전에는 친했지만 상황이나 처지가 달라져 멀어질 때도 있다. 상대방에게 내가 더 이상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그러나 맞지 않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참으로 오묘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맞지 않는 관계, 변한 관계에 매달리고 붙들려고 노력할수록 관계는 손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저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낫다.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에 유통기한이 있듯 이 관계도 유통기한이 다 되었구나. 놓아두어야겠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도 이 곳에서 아웃사이더다. 친한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타지에서 종교생활이나 친교 생활에도 적극적이지 않기에 여전히 존재감이 미미하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절대 연락이 오지 않게 되는 그런 관계도 생겨난다. 이 사실이 아직도 가끔 슬프고 아프고 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한다. 맞지 않는 관계를 굳이 오랫동안 끌어갈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어차피 "모두와 친구가 되어 오래오래 친하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식의 해피엔딩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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