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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 환자의 마음 재활

무너지다

내가 굳이 뇌졸중 회복에 있어서 신체를 회복하는 것과 별도로 마음을 회복하는 장을 만들어 써내려가는 이유는 뇌졸중 후 단 한 번도 심리적, 정신적 문제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는데 말이다. 뇌졸중 환자들에게서 우울증은 일반적인 후유증이라고 여겨진다. 이유야 감정을 조절하는 부분에 직접적인 손상이 생겨서일 수도 있지만, 발병 이전과는 달라진 본인의 모습에 정신적 충격이 안 생길 수 없지 않겠는가. 중증의 우울 증상을 보인다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크다면 뇌졸중 치료, 재활 과정에 있어서 신경정신과 진료도 함께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큰 문제가 없다면 심리적인 문제는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나에게는 뇌졸중 환자에게 기본 값으로 들어가는 걸로 보이는 약간의 우울증 약이 처방되었었다. 뇌졸중 후 무너진 자존감을 되찾고, 단단해지고,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너무나 힘든 시간들을 보내왔고, 멀리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정신적으로 조금씩 좋아지고 고등 인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던 경험을 공유해보고자 마음 재활 이라는 부분을 만들어 적어본다.

3-1. 무너지다



뇌졸중 후 정신적 충격


뇌졸중 환자들이 뇌졸중 이후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뇌졸중으로 쓰러진걸 알았을 때? 몸의 반쪽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가족과 의사로부터 ‘뇌출혈입니다.’,‘어느 정도 걸을 순 있겠지만 장애는 반드시 남습니다’와 같은 말들을 듣고도 상황파악을 못해서인지 큰 충격을 받지도, 무너져 내리지도 않았다.



자기효능감의 박탈


내가 무너졌던 순간은 바닥 친 자기효능감에서 비롯된 좌절감을 느끼면서였다. 뇌출혈 발병 직후 첫 한 달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이라면 아니 동물이라면 기본적으로 해결해야하는 배설(배뇨)의 문제조차 혼자는 불가능 했으니까 말이다. 출산할 때도 남편을 옆에 오지 못하게 했던 나였다. 그런데 누워서 기저귀와 패드에 소변을 보고, 남편에게 뒤처리를 하게 한다? 오줌에 젖은 옷을 갈아입혀준다? 아무리 인지수준이 저하되어 있고, 남편이 괜찮다고 하지만 적어도 당사자인 나는 아니었다. 수치심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게 수치심이지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사라지고 싶었다. 그냥 싫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샤워를 할 때도 서 있지 못하고, 앉아도 몸을 세우고 있지도 못하고, 다리를 가만히 모으고 있을 수도 없으니 늘 엄마와 남편이 힘을 합쳐 나를 씻겨 주었는데, 쭈그리고 앉아 나를 정성스럽게 닦아주시는 엄마의 모습, 늘어지는 내 몸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애쓰는 남편을 볼 때마다 내 몸뚱이 한번 바라보고, 그들을 또 바라보고 나면 욕실에서 확 미끄러져 꽝 하고 바닥에 부딪혀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몸이 다 부서져버리면 꽁꽁 싸매고 누워 있어야 하니 안 씻어도 될 텐데 하고 말이다. 가족이지만 신세지는 느낌이 너무나도 불편했던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1차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정신적인 고통이 어찌어찌 두통과 잠에 묻히며 조금 안정되는 듯 했다. 하지만 재활병원으로 옮기면서, 남편과 둘이 그것도 병원에서, 지지고 볶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서로 지쳐갔고, 이상해진 나를 바라보는 남편과 그 시선이 상처였던 나 사이에 점점 갈등이 깊어만 갔다.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 갑작스레 맞게 된 뇌출혈 투병과 뇌출혈 환자를 간병하는 일을 감당하기엔 우린 너무 젊었고, 너무나도 버거웠다.(남편과 나는 동갑내기다) 그렇게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보내던 우리는 스스로를 돌볼 여유도 없었고, 지쳐버린 몸과 마음은 서로를 이해하기엔 너무 많이 무너져 있었다. 고갈된 정신적 에너지는 당연히 서로를 향할 수 없었고, 우린 그저 5203호의 환자와 보호자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발병 초기는 가족들의 따뜻한 보호도 중요하지만 전문 간병사가 환자나 보호자에게 서로 좋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자기효능감도 자존감도 없다


날이 갈수록 몸 기능도 인지기능도 점점 좋아지는 데 반해, 이상하게도 무너진 마음은 다시 살아날 기미가 없었다. 몸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데다가 치료실에 수동적으로 옮겨지는(?) 내가 신랑은 너무 답답했나보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비해 내 모습이 생각 없어 보였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나를 테스트했다. 치료가 끝나고 다음 치료실로 이동해야 할 때, 다음 치료는 어떤 치료고 어느 치료실로 가야하는지, 어떤 경로로 가야하는지를 물었다. 몇 날 며칠을 다니는데 이것도 모르냐 는 식의 질문과 분위기, 거기에 눈뜨고 하루를 보내는 것도 힘겨운 나를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는 식의 내 불만은 늘 충돌이었고 그런 상처가 점점 깊어갔다. 치료스케줄을 통째로 외우고, 시간표를 그릴 수도 있었던 나는 이상하게 현실에서는 앞뒤 시간별 사건정리가 안되었는지 다음 치료가 뭔지, 어느 치료실로 가는지 인식하는 게 잘 안됐다. 머릿속으로 정리하면 운동치료 다음에 작업치료인 것은 알겠는데 진짜 운동치료가 끝나고 다음 치료를 가려고 하면 무슨 치료를 받으러 가는지 알지를 못 했다. 다음 스케줄에 대한 질문에 틀린 답을 하고 나면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한숨과 함께 계속 ‘잘 생각해봐’라며 맞을 때까지 두고 보자는 눈빛을 당하게(?) 되는데, 그 누구도 현실세계에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내 스스로도 나를 통제할 수 없음에 자꾸만 밑바닥 치는 나에게 시간표 따위(?)로 ‘넌 이것도 못해, 제대로 하는 게 없어’를 반복하여 자극하는 순간, 이 세상의 나는 사라진다.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고 통제할 수 있어야 생길 수 있다는 자기효능감은 깎이고 깎이다 없어지게 되면 자존감과의 경계에 도달하게 된다. 자기효능감이 떨어져서일 수도 있고, 인간의 욕구 5단계가 무너져 버려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혹은 줄여서 자존감(自尊感)은 자신 스스로를 가치를 갖춘 존재로 여기고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 감정을 의미한다는데 그런 자존감이 아니라 단순히 스스로 존재하는가의 여부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의심을 하게 되었다.


여긴 너무 낮아


그렇게 나는 늘 이 세상에서의 나의 존재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혼자만의 깊은 고민과 생각에 사로잡혔고, 멍 때리며 혼자만의 고민(?) 또는 망상을 하고 나면 일과 후 자율운동을 했던 2층 복도에서 1층을 내려다보며 새로운 세상으로의 이동(?)을 꿈꾸곤 했다.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여긴 너무 낮아, 썩 별론데’ 라고 생각을 하며 자리를 떠나면 ‘내가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만큼 힘들다는 것을 남편에게 티내고 싶던 나는 병실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가리키며 남편에게 물었다. “저 창문 열리는 거지? 다 열리나?” 위태로운 나의 말이 남편에게는 ‘나 힘들어’라는 나의 속마음보다 ‘ 저기로 나가고 싶어’라는 탈출의사로 보였나보다. 환자이면서 아내인 나를 위해 자신조차도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남편은 나의 뜬금없는 창문소동에 무너져버렸다. 발병 후 7개월 정도 지났을 때 있었던 일이다. 그 순간 남편에게는 내가 쓰러지던 날부터 나를 간병하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내가 창문이야기를 하자마자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며 나에게 온갖 폭언을 하기 시작했고, 나를 경멸하기도 했다. 의도와 다르게 돌아가 버린 상황에, 엎친데덮친 격으로 생전 겪어보지 못한 온갖 욕과 멸시와 모욕에 세상을 처음으로 원망했다. 발병 직후에도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냐고 해 본 적도 없는 나인데, 이 때 처음으로 살아있는 것을 후회하고 원망했다. 살아있는데 살아있는 게 아닌, 분명히 정상이 아닌데 정상이어야 하는 상황이 버거웠던 나는 당연히 남편이 느끼는 버거움도 헤아릴 새도 없이 급속도로 무너졌고, 그 사건이 있던 날 밤 우리는 화장실에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다른 보호자가 힘내라고 주셨던 네잎클로버

뇌졸중 환자의 특별한 능력


외부자극을 느끼고 판단하는 것들이 어려운 뇌졸중 환자들에게는 떨어지는 감각 기능만큼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 바로 상대의 에너지를 느끼는 것이다. 뇌졸중에 걸린 뇌과학자로 유명한 ‘질볼트테일러’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에너지의 역학 관계가 내게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살폈다. 내게 에너지를 안겨주는 사람이 있고 내게서 에너지를 뺏어가는 사람이 있었다(나는 내가죽었다고 생각 했습니다 중에서)


뇌졸중 후 사람의 에너지가 느껴지고 영향을 받다보니 병실 출입문에 “ 당신의 에너지에 책임지세요”라는 문구를 붙여놓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뇌졸중 환자들이 사리분별, 상황파악은 못해도 어떤 에너지가 전해지는지를 느낀다. 발병 후 보호자의 태도나 주변사람들의 행동 에너지가 뇌졸중 후 환자의 안정과 회복에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심리적 안정감의 필요성


뇌졸중 후 환자는 아기처럼 손이 많이 가다보니 아기가 된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단순히 행동들에서 아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보호자들이‘이 사람 아기가 됐어’라고 하는 것이 쉽게 표현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뇌졸중 환자가 단순히 혼자 못 먹고, 못 입고, 혼자 처리하지 못 하는 게 많기도 하지만 아기들처럼 나를 예뻐하는지 아닌지 에너지로 구분할 수 있다. 아기들이 자기 예뻐하는 사람은 안다고 하지 않는가. 일맥상통하다. 감각이 고장 난 뇌졸중 환자들은 보호자나 주변인들로부터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며 대해주는지, 애물단지로 보는지에 대해 에너지를 느낌으로써 안다. 확실히 보호자로부터 좋은 에너지를 받은 환자들의 심리적 안정감이 더 높은 걸로 보이며 안정된 심리를 바탕으로 재활치료에 안정적으로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 환자를 대하는 팁


독한 맘으로 알려주지 않아도, 굳이 짚어주지 않아도 환자 스스로 무능력함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 그러니 자꾸 그런 식의 자극 말고, 환자들은 자신을 발병 이전과 같은 인간체로 대해 주는 것을 바란다.

뭘 좀 못할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지만 환자 본인은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면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니까.

더 잘해주려고도 과하게 신경 쓰려고 할 필요도 없다. 당혹스럽고 부담스럽다. 환자도 ‘환자는 처음이라..’

그저 혼자 해보려고 할 때는 안전을 보장한 상태에서 혼자 해 볼 기회를 제공해주고, 가끔은 인정도 해주고, 비록 이상해진 부분이 있어도 잠시 나사가 풀어졌다고 생각하고 ‘조이면 되지~’하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족끼리 한심하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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