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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Sep 21. 2023

우리 회사가 매각된다고?

 초등학교 행사 중 농촌 체험이 있었다. 새끼 오리를 풀어주기도 하고 직접 모를 심기도 했다. 지역 어르신의 생생한 가이드까지 포함된 체험 활동. 모가 모인 논의 초록을 보고 있을 때였나. 그중엔 잡초가 있어서 곧 제거 작업을 하실 것이라 했다. 당최 어느 게 모고 또 어느 게 잡초인가. 같은 초록에 비슷한 생김새.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식물계 카멜레온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완벽한 위장술이지 않나 생각했다.


 잡초 같은 인생. 흔히 인생을 잡초에 빗댄다. 완벽하게 끈질긴 인생. 주위의 질타에도 꿋꿋이 햇빛을 받으려 고개를 든다. 그 와중에 너무 튀면 뽑히게 되니 옆에 있는 모를 롤모델 삼아 자란다. 생존이 목적인 삶. 절실한 욕심이 깃든 하루. 그 논에서 태어난 걸 어찌하겠는가. 잡초인 걸 남이 모르게 최대한 모에 빙의할 수밖에. 태어난 순간 고난을 마주하는 숙명을 지녔지만. 어느 하루도 열심히 살지 않는 날이 없을 테다. 우리는 이런 잡초의 고행을 알기에 인생이라는 귀중한 본질에 잡초를 비유하곤 한다.


 논은 비교적 안정된 환경이다. 관리하는 주인도 있지, 비옥한 토양도 있지, 청정자연이 만들어 낸 물도 있으니까. 반면, 야생 식물의 존재를 다시 보게 된다. 시멘트 사이에 피어난 민들레, 공원이 아닌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름 모를 풀. 오직 자연이 관리하는 야생 식물은 어떤 생존 전략을 펼치고 있을까. 시멘트 사이라는 불안정한 정착지에도 다른 민들레와 별반 차이 없이 자랄 수 있는 존재. 왠지 일반 민들레보단 더 대단해 보인다. 비단 인간의 판단하에 불안정한 정착지겠지만, 그 누구도 관리 목적으로 물을 주지 않고 옆에서 푸우푸 담배 피우고 있더라도 민들레는 잘 자라고 있으니까. 식물 입장에서는 시멘트 사이든 야생이라 불리는 곳이든 다 자연이고 그들의 거주지다. 외부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식물에게 생존을 위한 몰입력을 배운다.


 최근 드라마 같은 일이 나한테도 벌어졌다. 흔한 소재라 질타받아도 무방한 구조조정 사건. 드라마에선 매각이 되었다는 대사 이후 당황한 표정의 엔딩이 이어지고 자연스레 그 이후의 삶으로 전개된다. 그 중간의 과도기가 어떤지 어느 회차에서도 다루지 않았으니, 우리도 몰랐다. 이렇게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의 감정이 치솟을지. 처음 회사 사정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땐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는 집 계약을 앞둔 상황이기도 했고, 이직 계획이 꿈에도 없었던 사람이 여럿 있었으니까. 회사에서 마련하는 구체적인 방안도 없었다. 매각되는 회사에 주니어만 고용승계 된다는 것과 퇴직금에 위로금을 더 준다는 말뿐. 심지어 흡수합병인지 인수 후 합병인지 다른 대행사와 합병인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약 1-2개월 후에 계약이 완료되어야 알 것이라 했다. 그 1-2개월의 회사 생활을 드라마에선 다루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다이내믹한 상황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혼란을 넘어서 분노로 치닫는 단계는 매각 공지를 듣고 1주일 후였다. 낙동강 오리알 그 자체가 되어버린 상황에 분노. 1개월 뒤 없어질 회사에 매일 출근해야 한다는 것과 진행되고 있는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 쉽지 않았다. 각자도생이 펼쳐지는 분위기에서 팀워크를 발휘해야 한다니. 분노의 클릭을 넘어서 판단유보의 단계로 흘러간다. 일의 input엔 매크로 마냥 output을 도출한다. 전달자처럼 판단하지 않고 순한 양처럼 입력값을 읊는다. 이제 온에어도 마쳤고 범퍼든 지면이든 부가적인 업무가 끝이 났다. 판단유보의 순간을 벗어나 현타를 기반한 멍 상태에 돌입한다.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멍때리는 느낌이다. 광고업계에선 쉴 땐 확실히 쉬자는 마음을 갖고 있다. 어떤 선배는 8개월 동안 온에어를 한 적이 없고 놀았다고 했고 우리도 1-2달 푹 쉬었던 적은 흔했다. 인수라는 뉴스를 통보받은 지 3-4주 정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시간과는 흐름의 체감이 다르다. 흐물흐물한 달걀 2개를 밟고 올라선 느낌. 조마조마하다. 한쪽 달걀이 터져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정신을 부여잡는다. 회사 동기와 대화를 하며 서로의 멘탈을 챙겨준다. “이럴수록 서브 프로젝트에 집중해 보자고”, “머리를 비우고 후딱 옆그레이드든 업그레이드든 하자고” 우린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회사든 상사든 온전히 의지하기 힘든 상황 속 옆에 있어 주는 건 동기들이었다. 이렇게까지 동기들이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올 싶다. 우리 뭐가 되었든...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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