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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Oct 13. 2023

감성적이지만 감성적이지 않은 사람

 카피라이팅 교육이나 광고책을 보면, 카피라이터가 갖추어야 할 역량 중엔 꼭 공감과 감성이 언급된다. 타깃에 몰입한 후 공감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카피가 그들을 흔들리게 할 수 있다던가, 광고라면 우측 하단에 위치한 스킵 버튼에 자연스레 손이 가는 사람에게도 손짓에 일시정지를 안겨줄 감성적인 한 줄을 쓸 수 있다던가. 교육이나 책에서 말하듯 카피라이터는 꼭 공감 능력이 뛰어나거나 발라더와 같이 감성적인 사람이어야만 할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카피라이터 신입 면접 볼 때 알게 됐다.


 첫 회사 면접.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에 졸업만을 남겨둔 대학생이었다. 플레이리스트엔 검정치마, 오혁, 잔나비로 구성되어 있을 정도로 출처 모를 감성이 차올랐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포트폴리오도 감성적이었다. 인트로는 어릴 때 축구부 단체 사진, 아웃트로는 최근에 찍은 축구동호회 단체 사진. 사진으로 맞추는 수미상관이라니... 컨셉은 당연히 비밀이고 약간 세피아 톤이 더해진 건 더더욱 비밀이다. 돌이켜보면 코로나 타격이 컸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아무튼 듣고 있는 음악부터 생각 자체가 감성에 빠져있던 시기라 좋아하는 광고와 카피도 어찌 보니 감성적인 무드를 지녔었다. 다시 말해 스토리텔링 기법의 장초수 광고에 빠져있었다.


 “굉장히 감성적인 사람이네요.” 좋아하는 음악과 광고에 대한 내 답변을 들은 CD님의 답변이었다. 그 당시엔 이도 저도 아닌 사람보다는 확실한 성향을 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 순간 생각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하하;;” 사실 대답을 이어가면서도 숨겨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머쓱함으로 문장의 온점을 찍었다. CD님은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감성적인 사람이라도 감성적인 카피만 쓸 수 있으면 안 돼요. 포트폴리오를 보면 대체로 감성적인 카피가 많은데 여러 색깔의 카피를 쓰는 훈련을 하면 좋을 거 같아요” 조언을 듣고는 “감사합니다”란 말이 저절로 나왔다. 처음으로 현직자에게 듣는 카피 피드백이었으니까. 감성에 젖기보단 논리를 기반으로 카피를 쓴다는 건 뭘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던 내게 겸손함을 안겨준 피드백이기도 했다. 첫 카피라이터 면접에서 첫 불합격을 맞이했다. 의미 있었다. 어떤 부분을 디벨롭해야 할지 눈에 선했고 오히려 다행이었다.


 박나래님이 <나혼자산다> 추석 특집 편에서 한 말이 있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한다” 이 말 중 ‘이왕’이란 단어를 좋아한다고. 난 이와 반대되는 결이긴 하지만 자주 쓰지 않는 말이 있다. ‘기필코’와 같이 확신 가득하면서 이행하지 못했을 때 씁쓸함이 깃들 말을 잘 하진 않으려 한다. ‘기필코 골을 넣고 말겠어’라든지 ‘기필코 좋은 아이디어를 내겠어’라든지. 누군가는 젊은 친구가 욕심이 없는 거 아니냐는 핀잔을 줄 수도 있겠지만, 필사적인 마음가짐보단 여유로운 상황에서 재밌게 하자는 게 내 모토이다. ‘재밌지 않으면 왜 해?’란 말이 널리 공감받고 있는 요즘. 나도 마찬가지로 일할 때나 평상시에도 이런 마인드셋을 갖춘다. 재미없어 보이는 것도 재밌는 구석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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