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1.
2021년의 마지막 대체공휴일이다. 충격적인 건 평일의 마지막 빨간 날이란 것. 크리스마스마저 토요일이다. 이쯤 되면 빼빼로데이를 빨간 날로 지정해야 한다. 마지막 빨간 날이니 불태워야 하지 않나. 늘 그렇듯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의 찝찝함처럼 텐션을 높이기 쉽지 않았다.
10월 8일에는 하루 종일 이불속에만 있고 싶었다. 하지만 월급은 들어왔고, 날은 추워졌고, 여자친구가 보내준 힙한 브랜드몰도 알았는데 어찌 집에 있을 수 있을까. 오늘은 합정이다. 머리를 감으며 기나긴 합정으로 가는 경로를 생각해 봤다. 멀리까지 가는데 내가 알고 있는 옷 브랜드는 2개뿐. 시간은 애매해 저녁을 먹어야 하는 일정. 그래, 마지막 빨간 날이니 친구들끼리 색다르게 보내보자. 출발한 후 동네 친구들을 불렀다. 그렇게 4명이 모이기로 했고, 오랜만에 동네를 벗어난 동네 친구 모임이었다.
동네가 아닌 지역에 갈 때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가는 편이다. 순전히 발걸음이 가는 곳을 구경하다 서점에 들어가 책을 보곤 한다. 가끔 서점에서 서서 읽는 책이 더 맛깔나지 않나. 이날엔 예상치 못한 알록달록 서점을 발견한 날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약속 시간 전 1시간 20분을 어떻게 걸을지 지도를 본다. 합정역 9번 출구에서 7분 거리에 위치한 하이파이펑크란 브랜드는 여자친구 덕에 알게 된 옷집이다. 옷에 투자를 안 하던 내가 처음으로 10만 원 상당의 다크 그레이 블레이저를 산 곳. 당시 받는 용돈의 대략 3분의 1을 투자한 것이다. 깔끔한 외관과 내관답게 옷들도 깔끔하다. 직장인이 되고 하파펑(하이파이펑크의 준말)에 가니 사뭇 가격표가 가벼워졌다(대학생 때 보단). 사람이 붐비지 않아 좋았던 여긴, 긴 머리의 직원 한 명뿐이었다. 입구에 가까운 옷부터 차례로 스캔을 한 뒤 가장 아른거렸던 밝은 와이드 청바지를 꺼낸다. 2가지 정도가 있어 동시에 놓고 비교한다. 패션 디자이너라도 된 듯 나름 진지하다. 집에 있는 바지와 색이 얼마나 다른지, 주머니는 어떤지, 좀 색다른 포인트가 있는지 등. 처음에 봤던 바지의 태가 정직하지 않아 눈길이 간다. 한 번 입어보고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거 내가 딱 원하는 핏이잖아?! 심지어 허리띠도 매지 않아도 될 정도. 바로 구매를 했다. 그래, 이게 소비의 맛이지.
하파펑이 적힌 흰 봉지를 들고 여자친구 추천 브랜드 LLUD로 간다. 점점 가까워지는지 LLUD가 적힌 쇼핑백들이 차차 눈에 들어온다. 그곳은 LLUD 뿐만 아니라 다른 브랜드들도 입점해있었다. 셔츠는 단조로웠지만 바지와 자켓에 변주가 많은 곳. 가격도 기본 10만 원에서 괜찮다고 생각한 건 2~30만 원이라 아직은 부담스러웠다. 2층까지 싹 스캔을 한 뒤, 셔츠와 자켓 위주로 다시 둘러본다. 기본적으로 오버핏 셔츠로 구성되어 있어 손이 바빴다. 색만 마음에 들었다면 집에 가는 길에 들고 있는 봉지는 2개였을텐데. 그래도 합정에 다시 올 명분이 짙어졌다.
매장을 나와 발이 가는 대로 움직인다. 합정과 홍대 사이에는 골목골목마다 작은 매장들이 많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땡스북스에 들어갔다. 땡스북스의 첫인상은 동화 같았다. 들어오라는 아우성을 몸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발길이 가는 그런 미지의 곳이랄까? 친구들과 만나기 30분 전, 기가 막히게 서점이 눈앞에 등장했다. 처음 가는 의류 브랜드 매장엔 머쓱하게 들어가던 태도와 달리 내 집인 양 들어갔다. 정사각형의 서점이라 안락했고 종류별로 책을 나열했지만 카테고리를 따로 표시 안 한 게 좋았다. 뭐니 뭐니 해도 책은 책이다. 잡지 표지를 보다 시를 읽을 수 있는 경계 없는 그곳이 맘에 들었다. 오전에 갑작스러운 등산을 해서 그런지 무릎이 시렸지만 쭈그려 앉아 무릎 레벨에 있는 책 제목을 흝었다. '그래도 명색이 식품업계 카피라이터인데 음식 관련 책 읽어봐야지'. 무질서하게 놓인 책들 같지만 나름 식품은 식품끼리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러다 최근 빠진 에메랄드그린에 가까운 그린 표지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운명처럼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윤이나 작가의 라면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 베인 책이었다. 그래 이거지. 책을 구매하니 귀여운 배찌도 주더라. 요즘 이렇게 디테일한 감성이 왜 이렇게 잘 먹히는지.
책도 샀으니 이제 땡스북스의 주주가 된 느낌이다. 더 자유롭게 구경해도 된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 친구가 도착했다. 다른 친구는 10분 늦는다니 (이놈의 코리안타임) 각자 책을 읽기로 했다. 서점은 이래서 좋다. 다 같이 있어도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