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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명 Jun 02. 2022

장난감에 묻어있던 향토성

 “내일은 이마트에 가서 장난감 뭐 살까?” 점심시간 부장님이 보여준 아들의 일기다. 영특하다고 했다. 일기장을 소원장처럼 쓸 수 있는 지능은 가히 영특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는 장난감 쇼핑을 40분 동안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할머니가 어떤 장난감을 사주면 좋을지 미리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실소를 터뜨림과 동시에 뜨거운 부대찌개를 식히며 생각해봤다. 내가 어릴 때도 그랬나?


 어릴 때 대부분의 내 장난감은 향토성을 띠고 있었다. 매번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느라 진땀을 흘리게 했던 삼지창 모습의 효자손. 휘두를 때마다 명쾌하게 갈리는 바람 소리가 좋았다. 정신없이 전투를 하게 해주는 탁월한 사운드 효과였다. 정체불명 글자와 간결한 표가 프린트되어 있는 이면지들. 종이비행기의 동력이 되어주었다. 클래식한 종이비행기뿐만 아니라 더 날카로운 모습의 종이 전투기를 만들었다. 어릴 때 특이한 이력 중 하나가 종이접기 학원을 다닌 건데 접을 수 있는 거라곤 비행기뿐이라 그렇게 열중했었나…


 물론 다른 친구들과 즐겼던 장난감도 있다. 레고, 탑블레이드. 집에 레고를 모아 놓는 박스가 있었는데, 해리포터든 뭐든 다 섞여있었다. 건물을 짓는다기 보단 사람 모양의 레고와 창, 검, 방패, 총, 마법지팡이 같은 부수적인 소품들이 목적이었다. 레고를 인형놀이하듯이 칼싸움을 하고 근두운을 타고 도망가고, 어릴 땐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만화 삼국지에 흠뻑 몰입되어서 매일매일이 전시상태였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레고를 하는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레고 박스를 끌고 그 친구 집에 가서 이것저것 만들어보다가 결국 칼싸움을 한다. 입에 침이 마를 때까지 칼 부딪히는 소리, 주인공의 대사, 폭발음을 퍼붓는다.


 신기하게도 레고든 탑블레이드든 집안에 있는 장난감의 출처가 어딘지 모른다. 누가 산 건지, 아니면 얻어온 건지. 어릴 때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의 부류가 아니었다. 딱히 갖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은 이런 나를 굉장히 신기해해서 “저 총 사줄까?”, “사고 싶은 거 있어?”라고 먼저 물어보셨다. 그럴 때마다 “괜찮아요.”라고 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괜찮아요”라고 먼저 말하는 게 편해졌다. 실제로 흥미로운 장난감이 있어도 늘 “괜찮아요”가 먼저 나왔다. 그렇게 물욕이 없는, 떼를 쓰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면목동에 살 때 근처 시장이 있었다. 어느 날 왠지 모르게 시장 한복판에 있는 이름 모를 장난감에 눈길이 갔다. 레고는 아니고 플라스틱 재질의 사슴벌레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건전지를 넣으면 탱크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무슨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비주얼이었다. 그 사슴벌레 탱크를 사달라고 했다. 엄마는 의아해하시며 사주셨고 한동안 집에서 갖고 놀았다. 새로운 악당이 생긴 것이다. 이젠 눈에 보이는, 실체가 있는 악당. 이름하여 사슴벌레 탱크. 딱딱한 표면을 깨부수기 위해 여러 레고인들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연합을 했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결국 주인공은 살아남아 탱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장난감에 관심이 없다. 장난감은 아니지만 포켓몬 띠부띠부실이나 스티커를 모으는 것에 흥미도 없다. 포켓몬이나 디지몬어드벤처를 안 본 건 아니다. 매일 노래를 부를 만큼 좋아했었다. 몰래 TV를 틀어 볼 만큼 대담하게 좋아했었다. 지금은 감흥이 없어진 것일 테다. 막대한 시간과 돈을 써가며 스티커와 피규어를 모을 만큼의 합리적인 추억의 잔상이 부족한 것일 테다. 어릴 때 쓰던 효자손이 발견된다면 모를까. 장난감은 아니지만 만화 삼국지 전권을 다른 동생 집에 보낸다는 말을 듣고 꽤 심란했었는데 이 정도의 애정을 가져야 떼를 쓰든 다시 추억을 회상해 소비를 하든 할 수 있겠지. 어찌 되었건 당시 효자손의 효과음은 다른 액션 영화에 나오는 소리보다 더 주름이 들어가 있었다. 꽤 성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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