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시대적 배경은 춘추전국시대로 인간과 인간으로의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였다. 현재에도 크고 작은 전쟁이 발발하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글로컬리즘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즉 세계의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면 바로 현지화할 수 있는 기술력이 바탕이 된다. 이는 장자의 춘추전국시대에 인간과 인간의 대립적 구도를 넘어서 인간과 과학(기술)의 구도가 형성된다. 인간은 과학이라는 도구로 계속해 생산해내고 있지만 이를 수단으로 이용할 만큼 성숙한지, 능력이 뒷받침되는지에 의문점이 생긴다.
도가철학 수업 중 교수님 말씀대로 2025년도에 특성화 고등학교 등으로 인해 대학에 오고자 하는 사람이 적어질 것이라 본다. 이는 첨단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를 직접적으로 기술 적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기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자처하는 상황에 도래한 것이라 비판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의 급속한 발전과 AI의 등장으로 과학기술의 능력, 소위 베이컨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성적인 측면이 두각을 보이고 있다. 이 기술력을 각 나라에서 현지화하고 있는 과정 속 현재 우리는 그 과도기를 걷고 있다. 즉 과학기술과 인간의 구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해보면 이성적인 능력의 과부하로 감성의 측면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즉 이성과 감성의 균형이 성숙한 능력이라는 기준을 두고 본다면 현재 상황은 과학 기술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능력의 성숙도는 불완전하다. 물론 인간의 능력이 성숙한지를 위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도 문제가 된다. 본고에서는 다양한 기준 중 하나로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룰 때 그 능력이 성숙하다고 표현하고자 한다.
과학기술과 인간의 능력 불균형화
과학적인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인간의 능력은 이성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과 감성의 불균형으로 인해 발달하는 과학기술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최근 AI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예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했다. AI로 인해 작곡 분야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IBM이나 구글 등 글로벌 IT기업뿐 아니라 음악 스타트업들까지 AI를 이용해 영화, 게임, 광고 음악에 사용할 수준의 작곡 툴을 제공하면서다. AI 작곡 툴은 기본적으로 심층신경망을 바탕으로 한다. 딥러닝 통해 방대한 음악 데이터의 데이터 패턴을 분석한다. 이를 기반으로 장르, 템포, 길이, 음 밀도, 리듬, 무드, 악기 등 요소만 선택하면 음악이 생성된다. 지난달 21일 구글이 메인화면에 선보인 머신러닝 모델인 ‘두들’은 단 두 단락의 멜로디만 입력해도 AI가 키, 템포를 바흐 스타일로 추론해 작곡해냈다. 300개가 넘는 바흐 작품의 데이터 패턴을 추출한 결과다. 이런 AI의 목표가 창작이 아니라 작사·작곡가가 곡 만드는 일을 돕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만약 AI가 가창까지 가능한 시대가 도래한다면 인간의 예술 영역이었던 측면이 AI가 스스로 작곡·작사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제는 노래라는 예술적인 측면이 AI의 영역인 시대가 올 수도 있다.
예술이 감성적인 측면이라고 본다면 AI가 이제 이성과 감성을 모두 충족하려는 기술력을 어느 정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작곡, 기술적인 측면의 발달이지 작사의 완성도는 아직 인간의 능력보다 낮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플로우박스라는 작사 프로그램에 봄비와 꽃, 아침을 키워드로 입력하고 ‘스케치’를 클릭했더니 6~7개 문장을 자동으로 추천해준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리터치’를 통해 표현을 바꾸고, ‘라임’을 클릭했더니 ‘낯익은 골목길 위로/ 벚꽃의 터널을 지나/ One step two step/ 봄비가 되어 봄이 왔네’라는 가사가 나왔다. 입력한 키워드로 딥러닝을 통해 추출한 가사이다.
이러한 가사에서 나타나는 한계는 은유의 제한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존재한, 세상에 드러난 가사를 분석해 창작한 가사는 은유를 통해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감동까지 할 수 있는 단계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 필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존 사람들의 음악에서도 매번 같은 패턴의 춤과 가사 그리고 리듬이 반복되면 그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이는 저작권을 통해 법적으로 규제되어 있기도 하고 새로운 음악이 나오면 표절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도 많다는 점을 통해 우리는 참신한 춤이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가사 그리고 새로운 리듬을 지니고 있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는 본능이 내재해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현재 과학기술의 능력의 중요성에만, 즉 이성적인 측면으로 치우쳐진 인간의 능력은 감성적인 능력의 중요성을 제고하면서 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엄밀히 말해 2025년 대학에 오는 사람이 적어진다는 등 이러한 직접적인 문제 해결이라 보기는 어렵겠지만, 단지 인간이 어떤 방향성 혹은 정체성을 가지고 과학기술을 내면에 현지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제시할 수 있다. 즉 과학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하도록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능력의 성숙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장자의 은유를 통한 현대적 운용 가능성
AI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인 언어적인 측면 중 ‘은유’에 집중하고자 한다. 도가철학 수업 시간 중 기호관계의 임의성에 대해 “언어의 은유적 사용이 가능해지면 은유적 사용에 의해 새로운 의미 창조가 가능해지고, 인간의 지식 확장도 가능해진다.”고 했다. 은유는 낯선 것을 해석하는 사유 기재이다. 그리고 세계 확장, 외연을 넓히는 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안의 정체성을 확장하는 것과 우리 문명의 틀 또한 확장한다. 고로 인류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은유의 발전이다. 과학은 유지해주는 것일 뿐이다. 인간에게 은유적 사고가 없었으면 원시 상태에서 못 벗어났을 것이다. 인간은 은유를 사용하므로 매일매일 창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은유는 소위 감성적인 측면에만 있다고 보기 힘들다. ‘이성’이란 측면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확장하고자 한다면 은유가 사용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은유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균형을 깨뜨리는 것이기도 하고 깨뜨려진 것을 새로운 균형으로 이성과 결합해 맞추는 것이 가능하다.
우언은 십중팔구요, 중언은 십중칠이요, 치언은 날마다 새로워 끝없이 조화롭다.
<<장자·외편·우언>>
우언은 타인을 빌려 하는 말이고 중언은 이전의 중요한 사람의 말 그리고 치언은 매일매일 쓰는 자연스러운 말이다. 장자의 대화에서 도(道)의 실재 의미는 중언(重言)· 치언(巵言)·우언(寓言)의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중언(重言)· 치언(巵言)·우언(寓言)이라는 말은 플라톤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언어를 통해 외적 대상이나 내적 마음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장희숙(2018), 『삶의 智(Ars Vitae)와 생명의 윤리―장자의 관점에서 본 언어, 과학, 생명』,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102쪽)
그 중 치언에 집중해보자면 치(卮)는 술 담는 용기로 비어있을 때는 바로 서고, 가득 채우면 넘어지는 술잔이다. 즉 고정불변의 항상태가 없고 늘 변화 속에 있다. 즉 그 술잔이 술의 적고 많음에 따르듯이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과 상태에 따라 새롭게 언어의 의미가 변화되는 것이다. 치언은 구체적인 경험적 상황에 대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기점일 뿐, 그 실질적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치언의 단계를 AI가 대체할 수 있을까. 데이터를 추출하는 원리인 AI로서는 불가능하다. 고로 지금까지 AI가 인간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던 예술의 영역에 침투한 경우는 겉핥기 식으로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과학 기술 범주 속 글로컬리즘은 인공지능 등 과학기술이 현지화 즉 우리 사회 속에 적용되고 있다. 이를 거꾸로 뒤집는 것이 앞으로의 해결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즉 과학 기술이 침투를 못 하는 우리 인간만의 영역을 과학 기술이란 범주, 더 나아가 모든 범주에 적용을 시키는 것이다.
장자철학에서 답을 찾다
인류가 막다른 길에 부딪힐 때 고전을 통해 해결책을 찾았었다. 가령 송, 명 유학자들은 공자로 돌아갔기에 큰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기업의 트렌드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애플’ 또한 철학을 통한 앞으로의 해결과제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아직 철학자의 역할이 어떤지는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최근 기사에 따르면 애플이 저명한 철학자를 선임연구원으로 정식 채용했다. 애플 또한 과학 기술의 능력을 다 못 받아들여 고전을 통해 해결책을 찾고자 한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글로컬리즘에 살아가고 있는 곳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적용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즉 수단이 목적보다 앞서 있고 더 중요시되고 있다. 우리는 과학 기술이 그저 인류를 유지해주는 수단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을 통해, 이 세상을 사는 ‘나’라는 존재 의미를 확고히 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모르면서 살고 있다면 그저 톱니바퀴 돌아가듯 외부에 의해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즉 자기 정체성의 확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자기 정체성은 내적 언어를 외적 언어로 모두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특정한 단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즉 장자의 삼언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기 정체성의 틀을 굳건히 해줄 은유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유를 내제화함에서 더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데까지 확장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