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의 향연

김봉곤 단편소설 <그런 생활> 비평

by 무기명
1. 페르소나

김봉곤의 「그런 생활」은 평범한 사랑을 하고픈, 특별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이다. 일반적인 소설은 자서전 혹은 수필이 아니기에 가상의 작중인물을 두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물론 그 이야기는 작가의 배경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반영된 복합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탄생한 복합체의 대변인인 작중인물은 여러 상황을 맞닥뜨리며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2010) 내용 중 자살을 돕는 작중인물이 의뢰인이 오자 커피를 직접 내려주는 장면이 자세히 서술된다. 김영하는 ‘알쓸신잡’이란 예능 프로그램에서 ‘커피를 직접 내려 먹는 것을 즐겨한다’고 말했던 점이 연상된다. 어떻게 보면 작중인물은 작가의 페르소나가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작가는 임의의 가상 인물을 설정하지만, 김봉곤의 경우에는 다르다. 그는 동성애자로서 이성애자보다 특별한(?) 사랑을 하고 있다. 그의 사랑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소설은 임의의 가상 인물이 등장할 필요가 없어진다. 김봉곤을 직접 작중인물로 내세우면 그 누구보다 김봉곤과 그의 페르소나들의 이야기를 수월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김봉곤의 「그런 생활」에서는 실제 김봉곤이라는 사람이 화자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김봉곤의 페르소나들이 화자로 구성된다. 먼저 페르소나에 대한 이부영의 정의를 살펴보겠다.


페르소나는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이 된다. 때문에 자신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다변화하고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사회는 개인에게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할 것을 기대하고 요청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타인에게 인정받으며 그로 인하여 사회에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개인으로 적응할 수가 있다. 이렇게 사회적 정체성으로서 페르소나는 한 사람의 사회적 삶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며, 사회와 개인을 이어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개인이 쓰는 페르소나는 개인과 사회의 타협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부영, 『자기와 자기실현』, 한길사, 2002, p.111.)


급변하고 있는 현대사회라도 동성애자에 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세대는 쉽게 접할 수 있다. 김봉곤의 어머니는 “내 방금 서점에 서서 니가 쓴 거 다 읽었는데, 니가 쓴 이 글이 실화가? (…) 소설이제?”(109쪽)라며 아들 김봉곤의 동성애 사실을 기피하고자 한다. 이처럼 김봉곤은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한 ‘나’와 연인이나 지인들에게 인정받은 ‘나’를 오가는 ‘혼잡한 나’로 살아가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사회와 타협하기 위한 페르소나를 「그런 생활」에서 창출해냈다고 보았다.


2. 작가 김봉곤과 작중인물로서의 김봉곤

김봉곤의 「그런 생활」에서 작중인물은 김봉곤이 아니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남자, 정확히 말하면 김봉곤의 페르소나 이야기다. “실화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지”(110쪽)라고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듯, 김봉곤이 말하는 ‘소설’이란 단어는 평범한 남자를, ‘실화’라는 단어는 특별한 남자로 대칭 시킬 수 있다. 김봉곤에 평범함과 특별함, 두 가지 페르소나가 작품 외적과 내적에서 만나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그런 생활」 중반 정도에 명확히 드러난다. 김봉곤이 작중인물인 김봉곤의 페르소나에게 툭 던지는 말이 있다. “곤이야, 엄마한테 하는 거 반만큼한 형한테 해라. 형한테 하는 거 반만 엄마한테 하고. 나라면 형보다 엄마를 훨씬 믿고 싶을 것 같다, 논리적으로도 그렇고. 논리 안 통하는 가족이라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핏줄은 통한다.”(132-133쪽) 그 전 단락과 흐름이 상이해서 맥이 끊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러한 흐름을 지닌 형식으로도 김봉곤의 의식을 청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김봉곤과 그의 페르소나와의 대화 흐름이 혼잡함은 소설 속 인물의 복합체인 김봉곤이란 사람의 심리가 혼잡하다는 것도 반영되었으리라 생각한다.


3. 페르소나의 공존과 확장

형식 속의 혼잡함이 휩쓸고 지나간 후, 이제 김봉곤과 그의 페르소나가 공존하는 장이 펼쳐지기도 한다. “형을 여전히 사랑해(그건 사실이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근데, 이게 고마워할 일인 걸까),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지?(당연히 없다고 하겠지), 배고프지는 않아?(누가 구제불능인 걸까?)”(121-122쪽) 필자는 괄호를 작가 김봉곤의 개입이라고 생각한다. 작중인물 김봉곤은 자신의 특별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상대방의 외도에 관대하게 반응을 했을 것이다. “엄마, 근데 난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고, 일시적인 거 아니니까 앞으로도 괜한 기대는 하지 말고”(112쪽)라고 말하듯 동성애를, 그 사람과의 사랑을 영원한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그 사람과 틀어지게 되면서 “어쩌면 영원한 사랑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사랑 역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모습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런 상상을 한다.”(150-151쪽)라고 말하듯 일시적인 사랑이라 받아들인다. 이러한 과정은 페르소나의 공존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한 사람으로서의 사랑과 사회 인식 속에서의 사랑의 괴리 대신 공존이란 합의점을 찾은 경우도 있다. 더욱 자세히 말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사회는 김봉곤의 어머니가 동성애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반응이다. 김봉곤이 커밍아웃을 했다 하더라도 어머니와의 단절이 있지 않은 이상, 암묵적인 대립은 기저에 깔려있을 것이다. 작중인물 김봉곤의 어머니가 아들의 동성애 성향을 소설을 통해 접하고 한동안 연락을 끊었었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의 화가 누그러졌고 여느 때처럼 다시 연락이 왔다. “밥은? (…) 기죽지 말고, 어디 가서 기죽을 필요 없고, 미우나 고우나 내 아들이니까. 내 새끼다.”(148-149쪽) 이러한 상황과 같이 평범한 가족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며, 평범한 어머니로서 안부 인사를 전했다. 어머니도 아들의 성향을 인정했고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김봉곤의 연인이 외도했던 사건 이후 그는 속풀이를 위해 평상시 일상을 공유했던 C누나와의 메신저 내용이 일부 담겨있다. 이는 애인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C누나가 실존 인물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C누나를 김봉곤의 또 하나의 페르소나라고 본다. 김봉곤은 자신의 페르소나와의 대립에서 더 확장해 여성의 관점에서 자신의 연애 과정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결론짓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연인의 외도에 안일하게 넘어갔던 것을 되짚으며 연인에게 선물한 물건을 다시 회수하는 등 결국 최종적으로 결정된 행동을 기획하고 결정하게 된다. 여성의 관점의 페르소나를 통해 연인에 응당한 벌을 내리게 되므로 인연을 유지하기 위한 합리화를 하게 된다. 이로써 남성적 관점의 페르소나에서 더 확장한 여성적 관점의 페르소나로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4. 다시 작가, 김봉곤

작가 김봉곤은 2016년 등단과 동시에 커밍아웃 했다. 그의 소설에는 김봉곤이라는 사람이 줄곧 투영되어 있고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런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연인들의 흔한 레퍼토리처럼 프라이버시냐 나냐, 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었다.”(119쪽)에서 알 수 있듯이 ‘연인들의 흔한 레퍼토리’로 자신의 동성애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연애라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문장을 쓴 이유는 아무래도 동성애를 특별한 연애라고 보는 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귓속말한 것이 아닐까. 즉 청자들에게 ‘우리는 너희들과 같은 연애를 하고 있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활」 내용 곳곳에서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의 고충, 과장해서 말하면 사회적 한계가 나타난다. 평상시 남녀 연애 같은 경우, 내 연인이 나 몰래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하고자 했고, 주기적으로 그런 시도를 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판 싸우고 헤어지는 상황이 다수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고는 다들 지인들에게 공통된 위로의 말을 들을 것이다. ‘세상의 절반이 남자(여자)야.’ 동성애를 하는 사람은 이성애자보다 상대적으로 연인을 찾기 힘들 것이다. 한 가지 고리타분한 예로 카페에 앉아 있다가 눈이 맞아 연인으로 발전할 확률이 동성애자는 더 적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김봉곤은 외도한 연인에 대해 넓은 아량을 갖는다. “나는 일단 그가 아직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 안도했다.”(121쪽)처럼 그 사람을 잃을까봐, 혼자가 될까봐 불안해하고 자기 합리화로 이어진다. 이는 작가의 경험상 동성애자를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로 인해 심하게 싸웠을 사건에 대해 그저 무마하려고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설 속 김봉곤의 다양한 페르소나가 존재하지만, 실제 작가의 모습을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있었다. 소설 중–후반쯤에 문체의 변화가 생긴다. ‘~한다’와 구어체로 실제 말하듯이 가끔 메신저를 보내는 듯한 문체였으나, 김봉곤 자신의 실제 경험인 시상식 관련 이야기를 할 때는 ‘~습니다’, 문어체로 바뀐다. 시상식을 위한 쇼핑부터 당선 소감을 말하기까지의 흐름이 문어체로 연결되었다. 이 부분은 작가 김봉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을 따로 구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이렇게 문체가 바뀌는 소설은 그 이유가 있다. 문체의 정의를 보면 뷔퐁은 “문체는 곧 사람”, 쇼펜하우어는 “문체는 마음의 거울,”, 뉴먼은 “문체는 언어화된 사상”이라 했을 정도로 작가의 마음이 투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체가 이리저리 바뀐다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나 사상이 이리저리 바뀌는, 혼란스럽거나 혹은 혼잡스러운 상황, 정립되지 않은 마음과 사상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그런 생활」의 흐름은 다양한 페르소나의 등장과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임을 보았을 때 문체가 빈번히 바뀌는 경우도 작가의 심란한 마음이 반영됨을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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