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이른 나이 스물한 살에 나를 낳아 길렀다.
시골 청년이었던 군인 아저씨는 자신의 후배를 면회 온 여동생인 화려한 깍쟁이같은 아가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날 이후로 후배를 그렇게도 졸랐다고 한다.
"편지 한 번만 써줘. 그러면 오빠 군 생활 편해질 수 있어."
누구에게 갈지도 모를 그저 '군인 아저씨께'라는 제목의 편지를 쓴 엄마.
그런 편지를 받고 날아갈 듯 설랬다던 아빠.
그날 이후로 아빠는 휴가 때마다 본인의 집으로 가지 않고 서울로 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으면서 "장모님!" 하며 넉살스럽게 밥을 세 그릇씩 얻어 먹고, 자신이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넙죽 절을 했다고.
그렇게 서울 아가씨는 빛나는 도시 생활을 접고 하사가 된 아빠와 강원도 화천 산골짜기에서 살게 된다.
낡디낡은 18평도 되지 않는 허름한 군관사에서 둘은 행복했을까?
주면엔 마트도, 병원도, 노래방도, 도서관도 없는, 있는 것이라곤 밭과 시골길, 밤이 되면 우는 개구리들과 잦은 훈련으로 얼굴 보기 힘든 아빠뿐이었던 생활.
그래도 사랑 하나로 버티는 둘이었으리라.
내가 태어나고 동생이 태어나면서 하사의 월급으로 아기새처럼 오물거리는 우리의 먹성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병원 한번 가려면 버스를 타고 춘천까지 한참을 가야 했고,
유독 목이 잘 붓고 열이 자주 나는 나 때문에 더욱 고생했을 엄마.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아빠와 몇 번의 헤어질 고비를 넘기며 갸냘팠던 서울 아가씨는 더욱 강해졌다.
어느 날, 우리를 데리고 간 작은 동네 마트에서 비엔나소시지를 본 엄마.
서울에선 자주 먹을 수 있었던,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
너무 먹고 싶었지만 지갑엔 현금이 부족했고
그냥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엄마는 우리를 재운 뒤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고.
너무 일찍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버린 우리 엄마.
꽃다운 나이가 감당하기 힘든 삶을 산 엄마.
사랑의 힘으로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결혼생활은 가난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그녀를 지독히도 괴롭게 했으리라. 당장 먹고 살길은 막막하고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남자는 아이 둘만 남겨둔 채 바쁘다는 이유로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고 도시에서 청춘을 만끽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초라해지는 자신을 괜찮다고, 난 지금 행복하다고 달래는 일은 사실 그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지 않았을까.
그래도 나의 기억 속 엄마는 무척이나 씩씩했다. 자주 우리의 운동화를 깨끗하게 빨았고 언제나 걸레로 바닥 청소를 했다. 모아둔 비상금으로 기분이 한없이 울적해지는 날에는 동네 화장품 가게에서 가장 밝은 갈색의 염색약을 사와 비닐과 수건을 어깨에 두르고 즐겁게 염색하던 것이 유일한 엄마의 탈출구였으리라. 엄마의 손을 잡고 걸었던 시골길. 장날이면 우리에게 사 주었던 꽈배기. 뒤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간식이었던 마가린이 들어간 계란간장밥. 엄마가 되어보니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문득
그렇게 서울 아가씨가 살았을 젊은 날을 돌이켜보니 울컥하는 이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