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감기로 인해 병원으로 나섰다. 자신은 전혀 아프지 않다며 도착하기 전부터 투덜댔으나, 그래도 받기 싫은 진료를 꾹 참고 받았다. 어린것이 대견했다. 머리를 한 번 쓸어주었다. 간호사의 부름에 처방전을 받고 약을 지으러 병원문을 나섰다. 병원 밖을 나서자 아들은 그제야 한시름 덜어내듯 후, 큰 숨을 내쉬었다. 이어 손에 쥔 사탕을 주머니에 넣고 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약국에 들어섰다. 처방전을 내려는 데 나와 직원 사이에는 백발의 할머니가 서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할머니는 어째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비켜달라는 시선이 느껴지도록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봤다. 곧이어 나를 발견한 직원은 손을 뻗어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 대체 무슨 일일까.
우선 아이를 의자에 앉혔다. 잠시 기다리면 약이 나올 거라고 아이를 타일렀다. 순간, 할머니는 언성을 높였다.
"돈 계산이 잘못됐잖아!"
‘아, 그래서였구나. 그래, 계산이 잘못되면 화가 날 수도 있지.’
당황한 직원 곁으로 약사가 약을 짓다 말고 나섰다. 죄송하다며 계산은 정확하게 하는 것이 맞다고 할머니를 진정시켰다. 보아하니 이 약국에 자주 오는 손님이던 할머니는 지난번에 미리 계산한 약값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직원이 그걸 모르고 약값을 전부 받으니 미리 낸 오천사백 원은 빼야 한다며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투가 신경 쓰였다.
“암,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이런, 쯧쯧.”
갑자기, 나의 귓바퀴는 움찔했다.
아무런 상관없는 내가 들어도 마음이 저리는데, 그녀는 어땠을까.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일뿐이었다.
“엄마, 저 할아버지는 왜 저렇게 화를 내?”
며칠 뒤, 마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성이 잔뜩 난 할아버지가 직원에게 화내는 모습을 목격했다. 나는 놀란 아이를 데리고 이층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올라가면서 고개를 돌려 상황을 확인했다.
큰 키에 남색과 회색이 섞인 점퍼를 입고 있던 할아버지는 키만큼의 목청도 지니고 있었다. 푹 눌러쓴 모자는 할아버지의 짙은 눈썹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할아버지는 직원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나, 둘,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사십 대 중반처럼 보이는 여성 직원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계산대에 서서 물건의 바코드를 찍었다. 그녀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했다. 두 눈은 매달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힘을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러한 호통에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결국,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야 말았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도대체 학교는 어디 나왔어? 저기, 요 앞에 고등학교야? 얼마나 못 배웠길래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나, 참."
“네, 저 못 배워서 이런 일 하며 살아요.”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더없이 아팠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장을 보는 우리 옆으로 그녀가 지나갔다. 누군가 톡 치면 툭 하고 울음이 터질까 봐 어깨를 굽히고 조심스레 걷던 그녀는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진열장에 정리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의 남은 하루를 상상했다. 괜찮았을까. 괜찮지 않은 밤을 어떻게 달랬을까. 술로 달랬을까. 남편과 아이에게 그날의 모든 설움과 응어리를 짜증에 빗대어 토했을지도 몰라. 아니면 모두가 잠든 밤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남몰래 죽은 듯 울었을지도.
밤이 유독 짙었을 그녀를 나는 조금 더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