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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

by 김초아

첫 이사는 아홉 살의 끝자락이었다.

그해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왔다. 특히, 우리 가족이 살던 강원도 화천은 한 번 눈이 오면 성인의 허리까지 오는 탓에 이사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이사 날짜가 정해지고, 어머니는 이사 날만큼은 제발 눈이 안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뉴스를 꼬박 챙겨봤다. 어린 나는 그 옆에서 부디 이삿날 눈이 펑펑 쏟아지길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의 발령으로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된 친구들과 이별의 시간은 점점 다가왔다. 나는 매일 밤을 눈물로 보냈고 어머니는 그런 나를 애꿏게 달래야만 했다.

“그곳에는 친구들이 없잖아. 난 여기가 좋단 말이야.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절대 안 가!”

그 어떤 것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렸던 그때의 나는 정을 너무 주는 게 문제였다.


이사 날, 간밤에 드린 나의 절실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화창했다. 목에 두른 목도리를 풀어도 괜찮을 만큼 포근하게 추웠다. 이사 업체는 하필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곧이어 낯선 사람들은 집 안으로 들어왔고 나의 소중한 인형들과 눈물자국이 생긴 베개를 커다란 상자에 담았다. 겹겹이 쌓인 살림살이를 꺼내자, 그곳에서의 추억은 희뿌연 먼지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단 몇 시간 만에 모든 짐과 추억들은 트럭에 실렸다. 이사업체는 먼저 출발했고 우리 가족은 천천히 차에 탔다.


아버지의 양복이 구겨지지 않도록 어머니가 창문 위 손잡이에 걸어둔 덕분에, 나는 그것을 커튼 삼아 바깥을 보는 척을 하며 모습을 감췄다.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비틀거리며 스쳐 갔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소녀도 창문에 비쳤다. 하얀 산과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새와 벌게진 볼을 한 아이의 갈색빛 눈동자가 보였다.

빠르게 지나가는 낯선 도로, 낯선 공기, 낯선 사람들.

낯설지 않은 건 우리 가족뿐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의 맛은 바닷물만큼이나 짰다. 운전하던 아버지와 조수석의 어머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도, 동생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별을 감당하기에 아홉 살이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이사는 안녕하지 못한 안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낯선 도시는 우리 가족을 이십 년 넘는 세월 동안 품어주었다. 그곳은 나에게 다시 고향이 되었다.

동생의 손을 잡고 풀 내음이 아닌 습하고 짠 바닷바람을 맞으며 등교했다. 새로운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고 도토리를 주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파트 앞 단지에서 달팽이를 찾기 바빴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교복을 입고 무척 설레었다. 사춘기를 보내며 어머니와 싸우고 화해하길 반복했다.

스무 살, 벅찬 마음을 안고 대학을 갔다. 그리고 이 길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 돌아온 내 방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덥고 지쳤던 스물둘의 여름날, 청색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편을 만났다.

그가 나를 향해 짓는 수줍은 미소를 보며 이 손, 영원히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았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 첫째가 입학했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아이들과 도토리를 줍고 달팽이를 찾아 헤맸다.


이 도시에서

나를 지켜 주던 가족은 내가 지켜야 할 가족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발령으로 두 번째 이사를 하는 날.

“아버지, 나 갈게요.”

두 번째는 처음이 아니기에 울지 않으려 했는데,

또 바보처럼 울고야 말았다.


참, 그때나 지금이나 정을 너무 주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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