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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reach Jeju Dec 18. 2019

융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제주 창의예술교육랩에서 발견한 새로운 전망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창의예술교육랩 지원사업>은 ‘생태-인문’을 아우르는 지역문화자원과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과학기술'을 문화예술교육에 기반해 융복합하고, 미래 지향적 창의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연구·개발·실행하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출범한 '제주창의예술교육발전소'는 전문연구원들과 함께 과정의 실행 방향성을 이해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는 R&D랩, 교육전문가와 청년연구원이 협업하여 프로그램을 연구·개발·실행하는 D&I랩으로 구성되어, 과정의 가치를 기록하고 확산하고자 합니다.


역시 가장 큰 산은 ‘융합’입니다. 


생태랩, 인문랩, 과학기술랩 모두 문화예술교육 과정을 고도화하기 위해 녹록지 않은, 그 융합을 시도했습니다. 생태랩은 생태 교육에 미디어아트를 활용했고, 인문랩은 실물로 아지트를 짓는 프로그램에 가상현실(VR) 콘텐츠를 접목했습니다. 과학기술랩은 자연에서 느낀 나만의 감각을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해 새로운 예술 표현의 씨앗으로 삼았습니다. 경계를 넘는 이러한 시도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부합하는 결과를 내기 위한 그야말로 눈물겨운 분투였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흐름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학제 간 연구, 통섭, 학문 통합 같은 이름으로 여러 차례 유사한 파도가 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융합이 화두인 이유는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방증인 듯합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제주 <창의예술교육랩> 지원사업을 통해서도 융합의 산통은 이어졌습니다. 생태랩 양지수 청년연구원의 인터뷰는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생태 교육에 미디어아트를 접목하는 것에 내가 모르는 분야라서 ‘될까?’ 하는 마음에 두려움도 있었다.…결과적으로는 미디어아트 때문에 청소년 연구원들이 생태 교육에 흥미를 느꼈다. 아무래도 자연 탐방이나 자연물로 예술 작품 만들기 같은 기존 프로그램으로는 우리의 교육 대상인 청소년들에게 다가가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데 모티브를 제공했다.” -〈삶과 문화〉40쪽, 2019년 겨울호, 제주문화예술재단


결국, 융합은 이종의 학문이나 분야 간의 결합이지만, 그 이전에 개별 학문(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이었습니다. 이는 곧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연결하는 작업이라서 모종의 설득과 동의가 필수이며, 정해진 답이 없어서 무척이나 곤란하고 답답한 과정일 공산이 큽니다. 박진희 인문랩장의 회고는 그 과정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연구 개발하면서 청년 연구원들과 굉장히 오랫동안 난상토론을 했다. 나는 그게 지난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서로가 서로에게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문화〉41쪽, 2019년 겨울호, 제주문화예술재단



결정적 순간: 인문랩


이렇게나 힘겨운 과정을 뚫고 새로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제 생명을 획득해 가는 과정은 무척 극적이었습니다. 박동필 인문랩장은 그 결정적 순간으로 2차 시범 교육을 꼽았습니다

“마치 여러 장치를 연결하고 모터를 달아서 장난감을 공들여 만들었는데, 실제로 ‘움직이네’ 하고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죠.” 1차 시범 교육 때만 해도 교육 대상자인 아이들과 예술 강사와 교육 프로그램 간에 상호 작용이 뜻한 대로 일어나지 않았으나, 2차 때는 화학적 결합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1차 때와 달리 서로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으나 오히려 그들 사이에, 그리고 처음 만나는 선생님과도 관계가 형성되는 신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인문랩에게는 이때의 경험이 ‘자신감’으로 작용합니다. 아이들에게 마음껏 공간을 만들며 놀라고 했더니 뜻밖의 결과들이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3차 시범 교육 때는 조금 더 “놓은 채로”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그 결과 아이들의 그 어떤 활동과 행위에도 의미가 생기는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연구 개발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서로에게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는 오랜 과정을 거쳤기에, 그러한 ‘태도’가 교육 프로그램으로, 또다시 실행 과정에서의 화학 작용으로까지 이어지는 선순환을 일으킨 셈입니다. 그렇게 융합은 다른 융합을 낳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결정적 순간: 과학기술랩


허대찬 과학기술랩장은 두 가지 결정적 순간을 들려줬습니다. 하나는 성산에서 제주 창의랩 전체 연구원들과 함께한 ‘바람 감각 워크숍’입니다

과학기술랩에서 준비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라서 과연 어떻게 나올지 내심 걱정이었는데, 워크숍에 참여한 연구원들이 내놓은 반응들과 이를 범주화한 결과를 보고는 그때까지 떠다녔던 생각들이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융합의 실마리가 잡힌 셈인데, 하지만 풀어야 할 실타래는 여전히 길었습니다. 그 숙제는 산방산과 사계리 일대에서 진행한 시범 교육을 통해 풀어나갑니다. 이때가 허대찬 랩장이 꼽은 두 번째 결정적 순간입니다. “연구원들이 각자 맡은 부분을 최선을 다해 진행하는 모습에서 숨어 있던 역량이 드러났습니다. 연구실에서 논의했던 바들이 실제로 발화되는 장면이 너무 멋있었죠. 이거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대찬 랩장은 이때를 정점으로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시범 교육까지 너무 치열하게 달린 탓에 이후에 연구원들이 탈진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았으나 더 이상 좋을 수는 없는, 양가감정이 드는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연결하는 작업이라서 융합이 어렵다고 했는데, 허대찬 랩장은 그 지점을 다소 아쉽게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R&D 랩에서 다음 해에 창의랩 지원사업이 이어질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좀 더 자세한 논의를 담아 연구보고서를 펴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 생태랩

강술생 생태랩장은 마지막 순간을 꼽았습니다. 제주 창의랩은 12월 12일 목요일 오후에 8개월여간의 성과를 망라하는 성과공유회를 열었습니다. 각 랩에서 그간 연구 개발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 생태랩 연구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 명씩 돌아가며 생태랩의 전체 발표를 완성했습니다.


강술생 랩장은 바로 그 자리, 각자 역할을 나눠서 한목소리로 지금까지의 결과를 표현한 그 순간을 꼽았습니다. “아름다웠던 순간이 많았지만, 모든 것을 다 뛰어넘은 후에 서로 연결되는 느낌이 드는 지금이 소중한 것 같아요. 그 누구도 서로를 놓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죠. 각자의 온도가 조금씩은 달랐지만, 적정한 온도를 유지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 연결되는 느낌”이라는 표현에서 융합의 핵심은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적정한 온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의랩으로 함께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마지막 순간이 가까울수록 서로가 바라보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앞으로 무언가를 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점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2019년 생태랩에서의 협업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이들이 앞으로 해나갈 프로젝트에 융합의 기운이 더 서리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정녕, 융합을 선택하시렵니까


물론 융합형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해서 그 과정이 모두 설득과 동의를 반복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분야에 눈뜬 한 인물에 의해 조각들이 맞춰질 수도 있고, 좀 더 현실적으로 개별 연구원은 자신이 맡은 부분만 완성해서 내놓고 전체 그림을 그린 쪽에서 그것들을 모아서 결합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방식이 짧은 연구 개발 기간에는 더 부합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굳이 제주 창의랩이 무척이나 실험적인 방식을 선택한 이유와 그로 인한 성과가 무엇인지는 더욱 면밀하게 따져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R&D 랩의 연구보고서에서는 이 점을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의 고도화와 지역 예술가·교육자의 역량 강화가 양립 가능한 과업인지 질문해보고, 어렵다면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지도 숙제입니다. 랩별로 서로 다르게 접근한 시범 교육 시기와 횟수, 연구 개발과 실행의 분리, 복수 랩장과 1인 랩장의 역할 차이와 장단점 등 헤아려 볼 항목들이 무척 많이 남았습니다. 이를 통해 지난 8개월여간의 분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알 같은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도약을 위한 흥미로운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글: 박동욱 / 편집: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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