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가 직장인 나 같은 사람은 한 학기나 한 학년의 분기점을 짓는 행사에 익숙하다. 강당에 전교생이 모여서 애국가 부르고, 순국선열 묵념도 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부터 개학', '이번 학기 끝'이라는 선언이 있어야,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혹은 이렇게 끝났구나 하는 감각이 생겼다. 그러나 대학원은 학기의 끝을 알리는 종업식이 없어서 도둑과 같이 해방의 그날을 맞이했다. 콜로키엄과 논문 발표는 방학 중에도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공식 학기가 끝났다는 나만의 의식으로 학기 끝마다 일기를 남겨두었다.
"기말 발표가 끝났다. 논문의 한 단락을 추가해서 발표했다. 몇 개월 동안 수고한 나를 위해, 오늘 회식이라는 남편을 빼고, 아들과 둘이 갈빗집에 갔다. 탈탈 털린 영혼은 고기로 메웠다. 내일은 직장에 휴직연장원을 쓰러 간다. 대학원은 아직 한 학기가 더 남았다. 휴직연장원을 쓰면서 은행에서 마이너스 통장 한도를 증액하고 와야 할 것 같다. 시간을 비용을 지불하며 획득한 셈이다. 한시적이지만 외벌이 상황이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휴직하고 대학원을 다니는 3년 동안은 내 인생은 미시사가 아니라 거시사로 생각하기로 마음먹는다."
"한 학기가 또 끝났다. 일주일 단위로 시험 보는 상태로 한 학기가 지나간 것 같다. 직장 다니면서 야간에 대학원을 다닌 나의 교사 지인들도 많은데, 직장도 안 다니면서 대학원 다니는 상황에서 참 유난스럽게 공부하는 티 낸다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공부하는 일이 힘들다"라는 배부른 투정은 아껴두곤 했다. 그럴 때마다 투정을 나누기 좋은 동료들은 대학원 사람들이었다. 매주 수업이 끝난 뒤, 학교 앞 떡볶이집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며 지낸 장면을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을 남겨둔다. 겨울 강변의 신륵사도 가고 싶고, 양수리 수종사에 올라가서 통유리창 밖 강 풍경을 보며 청차도 마시고 싶다. 어쨌든 지금은 그렇다. 사 두기만 한 소설과 에세이도 읽고 싶다."
이렇게 일기로 한 학기의 소회를 정리하고 나면 공식적으로 마침표가 찍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마음속 행사뿐 아니라 외적 요소에 의해 학기 마감의 감각을 자각하게 될 때도 있었는데, 교무기획계 인사 담당 선생님에게 휴직 연장원을 쓰러 오라는 전화를 받게 될 때나 은행에 가서 마이너스 통장 한도를 증액하러 갈 때가 그랬다.
대학원 시절에 나를 사로잡았던 북한의 '1950년대'는 좀 특별했다. 미술평론지 성격의 잡지에는 북한 화가들의 뜨거운 논쟁을 현장 스케치해 놓은 글이 실려 있었다. 그들은 평양 고구려 고분 벽화 속 사신도의 청룡 형상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볼 수 있는가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화가 아닌 조선화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할 수 없다는 기고 글이 실리고, 그다음 호에는 이 주장을 반박하는 글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떠한 비판과 토론과 허용되지 않을 것만 같은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논쟁이 오고 갔다.
내가 떠올리는 북한은 자식에게 통치권을 세습하는 나라, 당을 비판하면 숙청당하고 아오지 탄광에 끌려가는 나라였다. 그 안에 사는 북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도 모르고 그곳이 지상 낙원이라고 믿고 살고, 통치자의 연설에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북한 화가들은 미술 평론지에 저마다의 다양한 가치와 지향점을 서술하고 논쟁하고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공화국에 대한 기대와 희망도 남아 있었다. 1950년대 북한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역동성과 고민이 있었다. 잠시동안 '반짝거리던' 시절이었다. 그 불빛이 1960년대 김일성 유일 체제 확립으로 사그라들었을지언정, 저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걸 할까, 판단이라는 걸 내릴까, 함부로 규정지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라고 신형철 평론가는 이야기했다. 분단선 너머에 있는 그들에 대해 우리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잡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해야 한다.
대학원생이 되어 사료 찾고, 분석하고, 추론하고, 퍼즐을 맞춰가는 시간을 보냈다. 한 줄로 정리될 문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자료를 찾고 맞추는 경험을 해 봤다. 앞으로 연구 주제 선정의 이유와 연구 방법이 담긴 누군가의 논문 서문을 읽게 되면, 그 단락에서 땀 냄새를 떠올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미술사 논문에서는 "이제는 도판 번호 붙여도 되겠다."라는 표현이 있다. 출판으로 치면 '교정 교열이 끝났고, 표지 고르면 되겠다."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지도교수님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여러 가지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서 잠깐 울컥했다. 소련 잡지 <오고뇨크> 보기 위해 중국 국가도서관에 갔다가 이곳에 그 자료는 있으나 열람을 불가능하다는 사서의 단호한 거절 답변을 들었을 때,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본 <인민조선> 잡지에서 그토록 찾던 작품의 컬러 도판이 펼쳐졌을 때, 새벽 시간 단톡방에서 서로를 다독이며 함께 공부했던 대학원 사람들과의 대화들. 언젠가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때, 친구는 모든 이들의 삶이 직선 같아 보여도, 가서 가까이 들여다보면 자잘하고 미세하게 요동치는 파장으로 살고 있지 않겠냐고 했다. 나의 대학원 생활 3년은 미세한 파장 정도가 아니라 요동치는 파도 같았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조증이 되었다가, 자료를 분석하고 글로 만들면서 울증이 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엄마는 집안일에 직장도 다녀야 하는데, 너는 공부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드냐", 중고등학생 시절에 공부가 부대껴서 감정이 예민해지면서 짜증을 내면 엄마는 가끔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공부만'이라는 표현이 서운해서 더 짜증을 냈다. "엄마는 공부가 얼마나 힘든 건지 알아?"하고 야무지게 받아쳤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엄마랑 했던 대화가 가끔 떠올랐다. 야자 감독이나 일이 밀려서 야근해야 할 때, 아이는 어디에 맡겨야 하는지 발만 동동 구르던 시간을 지나서, 이제는 직장도 가지 않고 '공부만'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때마다 순간순간이 소중했다. 내가 어떤 성격의 학문을 좋아하는지를 알게 된 시간이었다. 공부에 대한 내 취향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논문도 끝맺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