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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앙상블은 영원한 앙상블이다

영원한 주연이 없다

by 박희종

주말에 " 더블 케스팅"이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뮤지컬에서 항상 앙상블만 하는 배우들에게 주연배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연극 영화를 전공하고 한때 대극장 뮤지컬은 아니지만 많은 작품에 참여했던 나에게 이 프로그램은 정말 옛 생각을 떠오르게 해 주었다. 매번 나오는 참가자들은 각자의 이유와 사연으로 배우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으며 대부분은 앙상블 O연차라는 자막이 깔리고 있었다. 나와 와이프는 나름의 기준으로 참가자들을 평가하기도 하고, 그들이 부르는 뮤지컬 넘버들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렇게 프로그램을 보는 중 와이프가 뭐가 궁금했는지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시청자들의 반응이 너무 뜨거운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의 평에 대해 부정적이기도 하고, 이미 주연을 했던 사람이 나왔다고 공정하지 못하다고도 했다. 심지어 내가 제일 안타까웠던 댓글은

" 뮤지컬에 대해서 좀 알고 만드시나요? 이렇게 이미 나름 검증받은 배우들만 깔아놓고 결국은 모두 들러리 만들려는 거 아닌가요? 이런 프로그램으로 제발 또다시 상처주지 마시고 끝내세요 "

이런 뉘앙스의 댓글이었다. 나도 뮤지컬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일반 관객들보다는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더 체험해봤다는 정도일 것이다. 우선,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어차피 주관적이다. 나는 내가 주로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렸기 때문에 주로 오디션의 심사를 하는 입장이었는데, 오디션을 보게 되면 객관적 실력보다는 내가 희곡을 쓰면서 그렸던 캐릭터와 맞는 사람을 찾게 된다. 그러니 결국 얼마나 더 잘하느냐의 문제보다는 심사위원의 맘에 드느냐가 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 분야가 힘든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객관적 지표도 없고, 그 어떤 오디션도 주관적이지 않은 곳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탓할 수는 있어도 심사 자체에 대한 부정은 할 수 없다. (그들은 그 권한을 위임받고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저 프로그램에 이미 그 바닥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고 해도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원래에 취지에 맞게 진행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의 여러 가지 이유로 달라져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실제로 실력 있는 배우들이 제작진에 의해 포섭이 되어있고, 그래서 마지막 자리에 예상되는 사람들이 올라간다고 해도, 모든 지원자들에게 저 기회는 소중할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많은 작품들은 실력과 무관한 캐스팅이 이뤄지고 있다. 유명한 아이돌 출신이나 조금은 인기가 꺾인 가수들이 뮤지컬의 주인공으로 활약을 하고 있다. 심지어 많은 주연들이 더블 캐스팅이 되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아이돌이나 가수 출신의 공연 회차보다 다른 배우의 공연을 보면 실력이 훨씬 뛰어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결국 뮤지컬은 상업 작품이다 보니 그들이 가져오는 티켓파워와 인지도는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이 앙상블로 지내던 그 바닥이 이미 공정하지 않다. 심지어 그들은 이 프로그램이 끝나도 돌아갈 곳은 결국 그곳이라는 것이다. 소외받은 배우들만이 경쟁하여 1등을 뽑았다고 한들 결국 그들이 경쟁해야 하는 대상은 다시 또 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완벽한 공정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 불공정한 바닥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현실에서는 어차피 다 넘어야 할 산이라는 뜻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기회가 감사할 것이다.

" 배역을 받고 싶습니다 "

" 사람들 앞에서 완곡을 불러보고 싶어요"

"지금 나의 실력이 얼마 큼인지 판단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들의 간절함은 적어도 소파에 앉아서 편하게 프로그램을 보다 나만의 생각으로 그들의 기회마저 무시하며 올리는 한마디 댓글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크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그들의 노래에서 그들의 노력을 볼 수 있을 만큼의 안목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저 자리에서 저만큼 노래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발성연습을 하고, 수없이 많은 노래를 부르고, 선배들의 동영상을 찾아보고, 수많은 오디션을 찾아다녔을지, 나는 적어도 그 정도는 보인다. 그러니 그들의 기회가 더욱 가슴 아프고 쓰리다.

내가 희곡과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감사한 사람들은 내 작품을 읽어주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본인의 시간을 내어서 온전히 집중해서 읽어주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감동이 온다. (실제로 은사님이셨던 시나리오 작가님은 흔쾌히 내 작품을 봐주시겠다고 가지고 가셔서는 1달 동안 피드백이 없으셨었다. 나중에 말씀하시길 적어도 2번은 읽어봐야 나름 잘 알려줄 수 있어서 3시간의 여유시간을 내려다보니 늦어졌다고 말씀해주셨다.) 난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내가 수없이 불러온 노래를 온전히 들어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 대한 진심 어린 조언과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 심지어 TV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 그들에게는 그 무엇을 막론하고 무조건 도전해야 할 기회고 잡아야 할 기회인 것이다.

어차피 예능 프로그램도 사업성이 기본이다. 그렇다면 예선에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처럼 투표 조작이나 이미 1등을 정해놓고 진행하는 것만 아니라면 최대한 주목받을 수 있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그 안에서 그들이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 프로그램이 성공해야 그 안에서 단 한번 소개된 사람이라도 조금은 더 얼굴과 이름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의 예고에서 "한번 앙상블은 영원한 앙상블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이미 나도 많이 들어봤던 말이고,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슬픈 것은 저 말이 비단 뮤지컬 분야만의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예술분야에 있다가, 방송분야를 거쳐, 일반 직장생활을 하면서 쉽게 넘지 못하는 저런 선을 너무도 많이 봐왔다. 전문대 출신은 4년제 일자리에 지원도 하지 못하고, 계약직 직원들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정규직이 되지 못하며,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사회적 배경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우리들 마음속에도 스스로의 한계와 경계를 만들어 놓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도전하는 그들을 응원한다. 우선 대부분의 기준에서 대극장 뮤지컬의 앙상블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관객에게 박수를 받는 것은 주연 배우들만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존재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고, 그들이 주연이 자리만 찾을 수 있다면 언제든지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꿈을 쫓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가면 제일 이쁜 옷을 사나요? 아니면 제일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사나요? 우리는 당연히 나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삽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이 가장 예쁜 옷만 팔리는 세상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같은 옷을 입고 다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세상은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는 사람들이 이끌어가고 있고, 내가 비록 최고가 아니더라도 나와 맞는 자리가 있다면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불안하다고 걱정된다고, 남들을 흉내 내려고 하지만 말고 나만의 강점만 잘 발달시켜나간다면 나에게 꼭 맞는 자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수많은 도전은 최고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자리를 찾기 위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프로그램들을 너무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것도 좋고, 무언가 꿈을 이뤄나가는 사람들의 발전을 함께 지켜보는 것도 좋다. 심지어 이런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내내 두근거리고 설레는 나의 마음이 좋다. 내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다시 무대를 꿈꾼다고 해도 저들이 꿈꾸는 대극장 뮤지컬의 무대를 설 수는 없을 것이다.(그들의 무대는 그것을 위해 온전히 노력한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도전과 빛나는 무대를 바라보며, 언젠가 돌아갈 나의 무대도 그려보곤 한다. 비록 그들만큼 빛나지는 않아도 그들 못지않게 설레고 뜨거울 나의 무대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영원한 앙상블은 없다. 영원한 주연도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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