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나그네들, 나팔꽃과 버섯

by 다락방지기

눈 뜨고 있는 시간 동안 이 일에서 저 일로 내 에너지를 여기 저기 이동 시키다보면 하루가 저문다. 잠들기 전 내 주변에 덕지덕지 매달려 있는 현실의 일들은 내일로 미루고 여행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이국의 어느 도시에 있는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잠시 오늘의 여행자에 빙의해 그 발자취를 따르다보면 비슷하고도 기분 좋은 레퍼토리가 반복되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에 갔을 때도, 이집트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도, 태국에서도 그랬지.


어느 나라할 것 없이 그 지역 사람들이 커다란 배낭을 멘 이방인을 환대해주며 도움 주는 장면이 나온다. 말이 안 통해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손짓 발짓으로 알려주고 그마저 안되면 직접 데리고 가주거나, 밤이 늦으면 집에 묵고 가게 허락해 주기도 한다. 소박한 전통 가정식을 나눠먹는 장면에서,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주인공의 충만감 넘치는 표정이 클로즈업 된다. 마치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은 소매치기나 불법 이민, 성착취 동영상 유포, 세금 탈루, 비트 코인, 기후 변화 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여행은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평행 우주의 지구를 탐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온갖 현실 문제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 세계.


때때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행지를 떠나면 다시 만나지 않을 거고, 일이나 생활을 공유하지도 않을 거다. 나는 그에게 어떠한 역할도 기대하지 않고, 그 역시 나에게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리자면 그의 원과 나의 원이 겹쳐지는 부분이 매우 매우 협소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여행을 하는 동안 더욱 몰입할 수 있고 기대하지 못했던 환대가 짧고 강한 기억으로 남는다.


정원에도 그런 여행 같은 만남이 있었으니 바로 버섯과 나팔꽃이었다.


나팔꽃은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 나의 아빠가 손녀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며 주워 온 씨앗에서 비롯했다. 이것저것 참견하며 온갖 것들을 가르치는 데 일가견이 있던 아빠는 손녀에게도 마찬가지라 공원에 있는 나무며 식물 이름을 알려주고 잎을 만져보게 하며 산책했다. 그러다 때마침 나팔꽃 씨앗이 익어가던 시즌이라 토끼 똥같이 새까만 그것을 세 개 주워 집 안에 있던 가장 큰 화분에 묻어 놨다. 계절이 바뀌고 집을 옮기고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쏜살같이 뛰어다니게 되는 동안 나팔꽃 싹이 나길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덩치가 큰 벵갈 고무나무 화분을 테라스에 내놓게 된 건 단지 그곳의 빛이 너무 좋아서였다. 테라스에다 이불을 말리면 한 나절만에 바삭해져 자칭 ‘햇빛 부자’로 일컬었으니 빛이 필요한 모든 것은 다 밖으로 날라댔다. 잎이 밋밋한 초록색이 되어있던 벵갈 고무나무도 밖에 두고 쨍쨍한 직사광선 받게 했더니 새로 나는 잎들이 연노랑부터 진녹색까지 매력적인 국방색을 되찾았다. 매일 아침 다채로운 잎의 색을 감상하는 기쁨을 누릴 즈음 생각지도 못한 작은 떡잎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엔 뭔지 알 수 없었는데 바람에 날아온 잡초랑은 다르게 생겼고 이내 빠른 속도로 자라면서 덩굴손을 뻗어 고무나무 허리를 붙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잊고 있던 나팔꽃 씨앗이 떠올랐다. 이미 두어 해가 지난 일이었는데 흙 속에서 죽지 않고 피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나팔꽃은 아침이면 아름다운 푸른색 꽃을 피우고 저녁이면 다시 오므라들기를 반복하며 기세를 펼쳤다. 벽을 타고 올라가게 끈을 연결해줬는데 신기하게도 햇빛이 너무 강한 방향으로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 정말 똑똑한 식물이군!

벵갈 고무나무와 나팔꽃이 어울려 있는 아름다운 색을 감상할 때 마다 기대하지 않은 멋진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나팔꽃이 정말 아름다운 손님이었다면 버섯은 좀 음흉하고 미스터리한 나그네였다. 일단 여기저기서 출몰했다. 홍길동도 아닌 것이 한 번 나타났다가 다음 날이면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났다. 어느 날은 딸기 옆에 갓을 쫙 펼친 버섯이 보이길래 이대로 두면 포자가 널리널리 퍼져나가 딸기 화분을 다 덮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 미리 없애버리자.

버섯을 보이는대로 꺾었다. 그러자 포기가 빠른 편인지 한동안 안 보이다가 비가 온 다음 날 다른 화분에서 등장했다. 이런 식으로 두더지 잡기 하듯 여기저기 기상 상황에 따라 나타났는데 딱히 작물에 해를 입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이할만한 존재도 되지 못했다.

-뭐지?

그저 자연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줬달까? 식물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사람만큼이나 천차만별이라는 사실.


정원에 기대하지 않은 나그네 손님들이 오는 건 때로 반갑기도 하고 때로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여행 프로그램의 등장인물들 같이 손님을 환대한다는 전통이 없는 나로서는 나그네들이 골칫거리인 경우가 많다. 버섯과 나팔꽃은 사실 양반들이고, 까치나 개미, 진딧물, 배추 흰나비 등 쫓아내고 싶은 게 대다수다. 덕분에 그간 내 삶과 별 관계없던 까치나 개미들에게 악감정이 생겨버려 척을 지게 되었다. 정원을 가꾸며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쪼잔해지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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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갈고무나무를 붙잡고 쭉쭉 덩굴손을 올리는 나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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