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알뿌리 식물들

by 다락방지기

추운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날씨 탓인지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중학생 시절 새 학년에 조금 적응이 되고나면 학교 울타리를 두른 개나리며 라일락이며 아름다운 봄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안도감과 함께 대부분의 날들이 나른하게 기분 좋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는 오래된 시장이 있었다. 시장 앞 네거리에는 온갖 물건을 실어다 파는 트럭들이 오가느라 매일 매일이 활기찼다. 트럭에는 갓 만들어 온 따뜻한 두부라던가, 시골집에서 볼 법한 조리개를 비롯해 사용처를 모를 생활용품들, 번쩍번쩍 유약을 바른 항아리와 옹기류 등이 실려 있었다.

따뜻한 봄이 되면 이런 트럭들도 많아졌는데 특히 겨우내 볼 수 없었던 일명 ‘꽃집 트럭’이 자주 보였다. 1톤 트럭의 짐칸에는 잎을 늘어뜨린 벤자민 고무나무 화분이라던가, 히야신스, 수선화, 튤립 같은 꽃 화분 또는 고추나 상추 등의 각종 모종까지 그득그득해 꽃집을 방불케했다. 시장 구경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꽃집 트럭이 있으면 그 앞을 서성이며 예쁜 게 있나 더 오래 쳐다보곤 했다. 유난히 눈길을 끄는 건 단연 꽃 화분들이다. 자그마한 포트분에 꽉 들어차는 구근이 설핏 보이고 쭉 뻗은 줄기에서 색색의 아름다운 꽃이 핀 히야신스를 볼 때마다 살까 말까 고민 했다. 가진 용돈이 빤했는지, 엄마 허락 없이 사기가 눈치 보였는지, 잘 못 키울까봐 걱정이었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한 번도 사와서 키워본 기억이 없다. 알뿌리를 가진 아름다운 꽃들은 그렇게 나의 로망으로만 남았다.


정원 가꾸기 2년 차에 야심차게 도전했던 호박과 오이, 그리고 수박 덕분에 더 이상 경제작물은 심고 싶지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속상한 마음 반, 자꾸 결과 치를 신경쓰는게 싫은 마음 반, 한해살이 식물의 빠른 생육주기에 다소간 싫증난 마음 등. 없으면 섭섭한 상추 외에는 잠시 쉬고 싶어졌다. 이웃집들이 꽃나무나 상록침엽수를 가꾸는 게 이제 좀 이해가 됐다.

-텃밭은 줄이고 진정한 정원으로 꾸며보자.


오랫동안 로망이었던 아름다운 알뿌리 식물들을 떠올렸다. 옥수수가 자라던 화분을 가득 채운 빨간 튤립, 나비 애벌레가 들끓었던 배추 화분에 펼쳐진 노란 수선화 등. 아름다운 색채가 먼저 떠오르며 상상 속에서 여러 가지 색을 넣고 빼고 화단을 몇 번은 꾸미고도 남았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상상 속의 정원은 자꾸만 모네가 살던 지베르니 정원의 붓꽃과 수련을 복사, 붙여넣기 하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정원 가꾸기 유튜브 컨텐츠를 찾아보다 꽃과 나무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화원을 알게 되었다. 봄철이면 화훼단지 몇 군데를 돌아봤는데 아직 마음에 쏙 드는 곳이 없었다. 새로 알게 된 곳은 위치도 멀지 않고 방문객들의 평이 무척 좋았다. 봄에 피는 수선화나 히야신스 등의 구근 식물은 가을에 심어야 한다는 걸 알고 구경 삼아 11월의 어느 주말에 화원을 찾았다. 제법 기온이 내려가 아이들에게 두툼한 겨울 잠바를 입혀 나가야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곧 다가올 때라 그런지 상록 침엽수가 종류별로 크기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처음 방문한 화원은 규모도 크고 늦가을인데도 식물 종류가 무척 다양했다. 눈독 들이던, 봄철에 꽃이 피는 구근들이 한쪽 코너에 가득했다. 각종 양파(?)를 쓰러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꽉 채워 담은 바구니 앞면에는 개화한 사진과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 이곳이 멋진 신세계로구나!


로망하던 수선화와 히야신스는 무궁무진한 구근 식물 세계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일종의 포털같은 거랄까? '히야신스'는 마치 모든 K팝 가수를 ‘아이돌’이라 퉁쳐 부르는 것과 같이 무례하고 무심한 명칭이었다. 우리가 흔하게 듣던 꽃 이름이 각종 전문용어로 구분되어 분신술을 하듯 몇 가지로 늘어나는 마법을 경험했다. 놀라움의 최고봉은 튤립이라 튤립(캔디코너), 튤립(쿤윤), 튤립(크리스탈 스타), 튤립(니가타), 튤립(원종) 등. 정말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옆에 더 예쁜 애.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튤립 구근 코너만 도는데도 한참이 걸렸고 그 무엇하나 고르기가 어려웠다. 아이들에게 사진을 보고, 심고 싶은 꽃을 골라보라고 하자 신이 나서 비닐봉지를 들고 왔다 갔다 했다. 성미 급한 둘째가 이것저것 집어 봉지에 담으면 한글을 쓸 줄 아는 첫째가 얼른 따라가 구근의 이름과 수량을 종이에 써 붙였다. 하고 많은 튤립 중에 아이들은 역시나 춥파춥스 색깔을 연상시키는 튤립 몇 가지를 골라 담으며 진짜 이 꽃이 피는 거냐고 잔뜩 기대했다.

‘필거라고 생각하는데 글쎄 나도 확신은 없다.’

마음의 소리는 밖으로 들리지 않았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시도라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했다.

- 이 구근들을 한 겨울 내내 테라스 화분에 묻어놓으면...얼지는 않겠지? 물은 줘야 하나? 물주면 더 추워서 얼지는 않을까?

그간 한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죽은 각종 식물들이 떠올랐다. 추워서 또는 추울까봐 실내에 들였더니 생육 조건이 안 맞아서 등 갖은 이유로 우리 곁을 떠났지. 튤립 구근 개당 800원 모두 17개. 크로커스 10개. 무스카리 500원씩 5개. 히야신스 1500원 2개. 알리움은 7000원. 7000원? 700원인데 내가 잘못 본건가. 남편은 알리움을 몇 개나 담고 있었다. 구근 값만 해도 몇 만원인데 이걸 화분에 묻었다가 얼어 죽으면 어쩌지? 세탁기에 넣고 돌린 오만원짜리 지폐의 결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알뿌리 식물을 키워 꽃을 보겠다는 로망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갖은 걱정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야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이렇게 와 닿을 때가 또 있을까? 어디에 무엇을 심을까 고민을 할 것도 없이 한 겨울 추위에 얼지 않을 것 같은 제일 큰 화분을 골라 심었다. 줄을 잘 맞춰서, 심으라는 깊이가 맞는지 자로 체크해가면서. 11월의 구근 심기 이후 이처럼 길고 한파가 걱정되는 겨울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땅 속에 들어가기 전 사진 한 번 찍자. 다시 못 볼 수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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