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알뿌리 식물들 2

by 다락방지기

지난 겨울의 첫 눈은 ‘처음’치고는 양이 제법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창밖으로 고요히 눈 내리는 풍경이 잠시 아름답게 느껴졌다. 왜 이 같은 감상이 ‘잠시’뿐이었냐면 얼마되지 않아 재난 문자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아이 학교 휴업령까지 내리고 나자 고요하고도 매우 빠르게 쌓이는 눈이 무서웠다.

-이대로 집 안에 갇히는건 아니겠지?

-테라스에 쌓인 눈이 얼어 배수관이 막히면 어쩌지?

이미 테라스 어닝에 눈이 쌓여 아래로 추욱 쳐지고 있어 긴 막대로 눈을 털어내는 중이었다. 눈은 아주 빠른 속도로 쌓이더니 쿵 소리를 내면서 뒷집 어닝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창 밖으로 보이는 키 큰 전나무에도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나뭇가지가 아래로 쳐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몇 시간 전만해도 아름답던 풍경이었는데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이 되어 버렸다.


구근 식물들을 화분에 심은 지 꼭 열흘만의 일이었다. 땅이 얼기 전에 심어야 한다더니 묻어두자 마자 폭설이다. 물론 눈 내리는 것과 땅이 어는 게 반드시 관련 있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눈에 덮여있으면 땅은 온도가 유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런 월동 대책도 없이 갑자기 맞은 폭설은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화단에는 여전히 노란 메리골드 꽃이 무성하게 피어있었는데 하얀 눈을 뒤집어 쓴 꽃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테라스에 가득 쌓여 반쯤 얼었던 눈이 서서히 녹자마자 바로 월동준비에 들어갔다. 준비라고 하기엔 너무도 늦은 감이 있었지만 소 잃고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는 심정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월동 장비들을 다시 또 구입하고 싶지는 않아 집 안에 쓸만한 게 없나 찾아보던 차에 하루는 쿠팡에서 식료품을 꽤 많이 주문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종이 박스 안에는 비닐 뽁뽁이와 은박 보냉백 소재가 두루마리 휴지마냥 겹겹이 쌓여있었다.

- 오호라! 식품을 구입했더니 월동장비를 사은품으로 받았구나.

괜시리 즐거운 마음으로 두어 번 더 식품을 구입했더니 우리 집 화분을 빙 두를 만큼의 월동 장비를 마련했다.


우선 제일 큰 나무 화분은 은박 보냉백으로 옆 면을 빙 둘러 건타카로 고정시켰다. 나뭇가지 같은 배롱나무들은 비닐 뽁뽁이로 줄기를 빙빙 감았고 딸기 화분과 이동시킬 수 있는 화분들은 작년에 사놓은 작은 비닐 하우스 안에 모셨다. 비닐 하우스도 여닫을 수 있는 지퍼 부분이 망가져 벨크로 찍찍이를 붙였다가 강풍에 효과가 없길래 아이렛 똑닥이로 바꿔 다는 식으로 품을 많이 들였다. 나의 실과적 소양을 한껏 발휘하며 세상 모든 것이 배워두면 어딘가에 쓰인다는 어르신들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나마 월동 준비를 해 놓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후로도 겨우내 폭설과 강풍이 이어졌고 기록적인 한파도 피해갈 수 없었다. 12월부터 시작해, 날씨가 변덕스러웠던 3월까지도 문득문득 식물들이 휴면상태인건지, 얼어서 죽은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처음 심는 구근들은 특히 더해 땅 속에 묻혀있는 걸 꺼내 볼 수도 없고 그저 잘 지내겠거니 위안을 삼는 수밖에 없었다. 믿음을 갖는다는 건 그런 거다. 알뿌리 식물들의 겨울나기를 지켜보다 문득 아이들이 커가는 걸 떠올려 본다. ‘믿음’이라...이것도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첫 아이는 걸음마부터 늦은 아이였다. 조심성이 많은 편이기도 했고 먹는 게 시원찮아 신체 발육도 눈에 띄게 더뎠다. 18개월이 되어도 걸을 것 같지가 않자 육아서적 등의 메뉴얼대로 대학병원 진료를 예약했다. 다행히 진료 몇 주 전에 걷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예약을 취소했었다. 말도 늦어서 언어 치료 센터를 알아봐야하나 하던 차에 입이 트였다. 이런 비슷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자 조급함을 내려놓게 되었다.

- 우리 아이는 다소 느린 아이구나. 기다려줘야겠네.

초등 입학 직전까지도 한글을 더듬더듬 겨우 읽어 내려갔는데 이 즈음에는 조급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성장한다는 믿고 싶은 ‘믿음’이 있었다. 예비소집일에 학교에 갔더니 본인확인 차 선생님께서 생일이 언제냐고 아이에게 물었지만 아이는 답을 못했다. 집이 몇 층에 있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다 대답하고서야 안내장을 받아 귀가할 수 있었다.


느린 아이를 키우다보면 여러 가지로 답답하고 속상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나도 단단해져서 이 아이에게 맞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학교에서 뭘 그리 많이 배우겠나 싶지만 또 그게 적기교육이라서인지 더듬더듬 한글을 읽고 때로 기역과 시옷을 헷갈려하던 아이는 한 학기동안 일취월장하여 100쪽이 넘어가는 이야기책도 혼자 술술 읽게 되었다. 한글읽기의 한 고비를 넘어가니 이제 맞춤법과 띄어쓰기, 어휘, 수학의 셈하기 산이 등장했다. 누구는 1학년 때 받아올림 있는 셈하기 학습지가 너무 재미있어서 한 자리에서 수십장을 했다던데 우리 아이는 대여섯 문제를 푸는데도 세월없다. 손가락의 도움을 받아가며. 예전 같았으면 그런 말을 듣고 조급했을텐데 이제 그러려니 한다. 내 아이의 속도와 방향에 맞게 가는 수밖에 없으므로.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각자의 골인 지점이 모두 다르므로 혼자 달리는 마라톤 같은 거라 생각한다.


3월 8일이 되자 묻어두었던 튤립과 알리움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튿날은 알리움이 하나 더. 2주 뒤에는 크로커스가 노란 꽃을 피웠다. 한 달도 더 지난 지금 일찍 개화한 튤립은 벌써 꽃대를 잘라줘야했고 여전히 키를 키우며 꽃봉오리를 올리는 녀석들도 있고 저마다의 속도로 아름다운 화단을 보여주고 있다. 뒤늦게 꽃봉오리를 올리는 키작은 튤립을 보고 있으면 우리 딸아이 같다. 조금 느리지만 그렇게 맹렬한 추위를 이겨내고 싹을 틔운 씩씩한 녀석이다.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우겠지. 힘내렴! 구근식물들도 저마다의 속도로 자라나는데 하물며 아이들은 말해 무엇해. 이제 귀염둥이들을 깨워 학교 갈 준비를 시켜야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른 아침, 저마다의 속도로 일어나는 우리 식구들. 아들은 아침형인지 스스로 일찍 일어나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고 딸은 깨우기 시작하고 5분쯤 뒤에야 일어난다. 식사시간만은 제발 같은 시간에 맞이합시다...)


크로커스 새 잎이 나옵니다. 옆에 누르스름한 것은 지난 해 심고 그대로 뒀던 무스카리 잎. 무스카리도 죽지 않고 살아났지요.
크로커스가 제일 빨리 개화했고 무스카리도 꽃대가 나오고 있네요. 노란색 크로커스만 개화하고 보라색은 하나도 안 폈다는 미스테리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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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1호 싹. 죽지 않고 살았다는 안도감. 알고보니 이 튤립들이 평균 하드니스 존 3에 해당하는 추위에 강한 아이들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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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꽃은 이미 꽃대를 자르고. 맨 아래 아주 작은 캔디코너를 보면 우리 아이 같아요.
KakaoTalk_20250614_161440177_06.jpg 튤립들. 꽃을 보면 아름다움보다 강인함에 더 감탄합니다.


알리움. 2개를 심었는데 결국 하나는 꽃을 못 보고 한 송이만 살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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