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터를 일구었다. 정원을 꾸밀 작은 공간이 생겼다. 그간 아파트 베란다나 창가에서도 끊임없이 씨앗을 심어왔지만 직사광선과 빗방울을 맞으며 공기가 통하는 테라스라면 전적으로 다른 스테이지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역시나 그간의 경험이 한 몫 한다.
결혼하고 첫 집에서 로즈마리 화분을 키웠다. 너무 작은 포트분 보다는 중간 정도의 크기를 사야 잘 죽지 않는다고 들어서 제법 큰 녀석으로 데리고 왔다. 빛이 잘 드는 창가에 두고 환기가 잘 되도록 출근할 때 마다 문을 손마디만큼 열어놓고 나왔다.
-쑥쑥 잘 커라. 아가.
손으로 쓰윽 쓰다듬어주면 한참동안 내 손에서도 로즈마리 향기가 남았다. 흐뭇하게 로즈마리를 바라보며 이게 행복이라 정의를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즈마리가 시름시름 잎이 처지고, 통통하던 초록빛 잎이 얇아지면서 가시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물이 많아서인가, 물이 적어서인가, 햇빛이 강해서인가, 햇빛이 약해서인가, 맑은 공기가 부족해서인가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이런저런 생육 조건들을 바꾸어 보았다. 출근길에 화분 흙에다가 액체 영양제를 링거마냥 꽂아주고 퇴근하자마자 좀 나아졌나 들여다보는게 일과가 되었다. 마치 병든 용왕님을 낫게 하려고 온갖 방도를 다 찾는 문어 대신 같았다. 바닷속 신하들이 토끼의 간이 필요하다는 처방에 솔깃하는 것 처럼, 로즈마리를 낫게 하는데 쇠똥 비료가 필요하다고 했으면 믿져야 본전이라며 우사를 찾아갈 판이었다. 이런 간절함에도 로즈마리는 시름시름 앓다가 과거 내가 키운 많은 식물들이 그런 것처럼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 역시 로즈마리는 통풍이 중요하다는데 마당에서 키워야 해.
기승전 다시 마당으로 귀결.
남편은 나같은 식물 편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성격 탓인지, 직업 특성 탓인지 두루두루 맥락을 살피기 보다는 하나에 꽂히면 파고들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었다. 아름다운 분홍 꽃이 가득한 첫 번째 수국이 죽어버리자 그는 다소 화가 난 듯 했다.
- 어쭈 이것봐라.
하듯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수년 간 수국에 몰두하게 된다. 아름다운 꽃이 피었을 때는 그렇게 쳐다보면서 물 좋아하는 식물이라며 흙 마를 틈 없이 물을 주더니만 잎이 누렇게 지고 나니 발을 동동 구르다, 죽고 나니 화를 내는 꼴이었다. 그도 역시 나처럼 온갖 원인을 추측하며 애타하더니 결국 원인을 찾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틈만 나면 수국을 다시 한 번 키워보자,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하며 수 차례 아파트 베란다에 들여왔지만 예쁜 꽃은 한철이었다. 죽지는 않아도 더 이상 아름다운 꽃은 보여주지 않고 깻잎 수국만 몇 해 동안 길렀다.
그동안 각진 턱의 청년이던 남편은 얼굴 선이 둥글둥글한 아버지가 되고 속앓이를 하며 몇 군데 직장을 옮기는 터에 첫사랑이던 수국은 잊혀 지고 지나간 짝사랑이 되고 말았다. 새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남편에게서 잊혀 졌던 수국이 다시 가슴에 불을 지피고 말았다. 그는 아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미뤄왔던 것이다.
해마다 식목일 즈음이면 농협 하나로 마트에 꽃나무 시장이 열린다. 아무 것도 안 사고 그냥 구경만 해도 봄이 왔다는 생각에 가슴 두근 거리는 그 곳을 이제 마음껏 쇼핑하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꽃과 모종을 하나씩 다 사다 테마별 정원을 만들어 놓고 싶었지만 최적의 조화를 상상하며 누굴 모셔갈지 선택해야 했다. 행복하고도 지나치게 진중한 고민이 시작된다. 어린 잎을 따다 삼겹살 싸먹을 생각을 하며 상추 모종 담고, 상추도 종류가 많아 청상추, 로메인, 적상추 골고루 담아보고, 상추만 싸 먹으면 섭섭하니까 쑥갓 모종도 담고, 사진 속 흰 꽃이 예뻐서 완두콩도 담고, 허브 화분 하나 있어야지 하며 애플민트 담고, 그리운 로즈마리 담고, 아이들이 심고 싶다니까 옥수수 씨앗도 담고.
싱글벙글 웃으며 아이들과 모종 담느라 바쁜 동안 남편은 저기 멀리서 다른 걸 기웃거린다. 그의 짝사랑 수국. 아직 봄이 이르지만 하우스에서 키웠는지 이미 탐스러운 꽃이 하나 둘 피어나는 화분도 있었다. 남편도 이번만큼은 잘 키우고 싶다는 간절함에 어느 화분을 골라야 할지 한참을 진지하게 살핀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만 줄기 개수가 적당하고 튼튼해 보이는 중간 크기 화분을 카트에 담았다.
-바로 너야, 너.
하듯 남편은 흡족해 했다.
내가 수확물을 생각하며 모종을 고르듯이 남편은 인과관계를 따지며 좋은 흙을 골랐다. 지렁이분변토, 텃밭용 상토, 과채용 비료 등. 그간의 실패 원인이 흙이라고 생각했는지 카트 가득 흙을 담았다. 계산하고 돌아서면 또 모종 한 두 개 더 사고, 흙도 한 포대 더 추가하고, 계산기에 생각보다 많이 찍힌 숫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물 쇼핑은 계속되었다. 완벽한 정원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집까지 오는 차 안에서 식물들이 뜨거워 시들까봐 부리나케 돌아와 해지기 전 작업을 마치려고 서둘렀다.
23년 정원 가꾸기 원년의 식물 쇼핑은 주로 경제작물이었다. 내가 심고 가꾼 것을 먹겠다는 로망이 컸는데 그 해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듬해에는 사업(?)을 확장했다가 된통 당하고 말았다. 이런 경제작물들은 대부분 한해살이 식물이라 정원가를 더욱 부지런하게 만들어 고단하게 만드는 종목이라는 걸 이제는 깨달았다. 무튼 그 때는 뒷 일 생각않고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에 푸욱 빠져들어 카트가 꽉 차도록 모종과 씨앗과 꽃나무를 쓸어담을 때였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처음엔 너무 지나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