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어디를 시작이라고 할까?

by 다락방지기

첫째 아이를 아기띠에 메고 다닐 때 자주 들은 질문. ‘여자 아이예요? 몇 개월이예요?’.

이 두 문장은 마법의 질문과도 같아서 일단 입 밖으로 내기만하면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객관적 사실을 답하기만 하면 되니까 어려울 게 없다. 그러다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어린이 집에 다니게 되자 ‘걸음마는 언제 했어요? 언제 입이 트였어요?’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대부분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약간 어색한 엄마들 사이의 첫 인사였다. 그런데 이건 좀 달랐다. 언제를 시작이라고 해야할지 나도 고민되는 거다. 상대방은 인사처럼 한 말인데 세월없이 답을 고민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대략 몇 개월 즈음이라고 일단 답하고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붙잡고 서서 한 걸음 뗀 거? 내 손 잡고는 그럭저럭 걸어다닌 거? 혼자 잘 걷게 된 거? 물론 걷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생각보다 순식간에 발달되어 대략 몇 개월 즈음이라고 답하면 틀린 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말한 답이 마뜩찮았다. 아이 걸음마의 시작은 과연 언제부터일까? 시기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즈음, 양육자의 주도면밀한 관찰 너머 이미 뭔가가 진행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내가 태어날 때 부모님이 세들어 살았다는 다송 고모네 집은 붉으스름한 용마루로 지붕이 연결되는, 한옥과 양옥 그 중간쯤 형태의 집이었다. ‘엄마’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엄마는 언니인지, 나인지 모를 아기를 안고 마당에 핀 나리꽃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었다. 하루의 절반은 자고 절반은 젖먹던 내게 그 집은 단 한 장의 사진으로만 기억된다.


조금 더 커서 이러 저리 뛰어다니느라 무릎이 성할 날이 없던 나는 철길 근처 다세대 주택에 세 들어 살았다. 마당이랄 것도 없는 집 앞은 시멘트로 칠해진 수돗가 뿐이었는데 철저히 기능성에 집중한 생활 필수품 같은 공간이었다. 시멘트 바닥은 그 어떤 잡풀도 뿌리를 내릴 수 없게 철통 방어하는 성벽이었다.

글씨를 쓸 줄 알게 된 이후, 내가 살던 집은 모두 아파트였다. 안과 밖은 현관문으로 구분되어 집은 흙 먼지 하나없이 깨끗했다.

- 엄마 나도 마당 있는 집에 살고 싶어.

- 너도 참 웃기다. 마당 있는 집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그걸 그렇게 좋아하네.

흙 마당 있는 옛집에 세 들어 살다 번듯한 자가 아파트로 이사 온 엄마에게 아파트는 더 나은 삶이자 재산이고 열심히 살아온 결과였다. 나의 마당 타령은 그냥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국민 학생이던 나는 아파트에서도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에 뭔가를 자꾸 심었다. 물체주머니에 든 씨앗이나 학교 과학실에서 수업하다 두어 개 넣어온 외떡잎 식물, 쌍떡잎 식물 씨앗 또는 봉숭아 물들이기 숙제하려고 문구사에서 사온 꽃씨 등을 심었다. 옥수수 키가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밥그릇만한 화분에 심어 옥수수가 달리기를 기대한 적도 있었다. 결국 옥수수 열매는 커녕, 외떡잎 식물의 잎맥을 관찰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했다. 봉숭아도 싹은 텄지만 꽃 피우는 데는 실패해서 엄마가 회사 담장에서 몇 송이 따온 걸로 손톱 물들이기 숙제를 해갔다. 이렇게 대부분의 식물들은 씨앗이 썪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정도까지만 크는 데 성공했다. 그럴지언정 나는 끊임없이 뭔가 심어댔다. 후천적인 노력형 그린 핑거가 되는 게 막연한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023년 2월의 첫 날 새 집으로 이사 왔다. 결혼하고 얻은 세 번째 집은 연립주택이었고 식물이 뿌리 내릴 흙 마당은 아니었지만 테라스가 있었다. 테라스 바닥은 칠이 벗겨진 나무 데크가 깔려있었는데 지난 해 침수로 인해 배수구 근처는 데크를 걷어내 녹슬어가는 물막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걷어내고 남은 나무 판자들은 한 쪽에 켜켜이 쌓아둬 이걸 치우는 건지, 다시 까는 건지 알 수 없는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나무 재질 바닥과 어울리게끔 철제 울타리도 원목으로 덮어놓았는데 역시나 세월 탓인지 부서지고 뒤틀려 중간중간 뜯어진 목재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라스 가장자리에 있는 화분에는 이름 모를 앙상한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겨울이라서인지 누런 잡풀들 사이에서 쓰러질 듯이 기우뚱 잠들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여전히 쌀쌀한 날씨 탓에 더욱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었지만 이 테라스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가. 후천적 노력형 그린핑거의 꿈을 이룰 수 있다! 기쁜 마음과 조급함이 더해져 이사온 지 며칠 만에 텅 빈 테라스에 돗자리를 펴고 소풍 나온 어린이들처럼 김밥을 먹었다. 여전히 찬바람 탓에 우리는 패딩을 입고 밥을 먹었지만 나는 이 테라스가 멋진 정원이 될 거라고, 내 삶을 바꾸어 놓을거라는 기대감에 들떴다. 언제부터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 속에는 늘 꼬마 정원사가 살고 있었다.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멀리 떠나버릴 법도 한데 미련이 남아 그 자리를 지키며 백수 신세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김밥 먹다 2월의 세찬 바람을 맞고서는 꼬마 정원사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지금 두 발로 단단히 딛고 일어서 걸음마를 하려고 하고 있다. 넘어지고 무릎이 까지는 날들이 빤하지만 씩씩하게 일어나 아름다운 정원을 가꿔나가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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