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_침대
“소파랑 침대, 됐고. 책상은 인터넷에서 주문하기로 했고.”
남자는 ‘3인용 소파’와 ‘퀸 사이즈 침대’ 앞에 있는 체크 박스를 터치했다. 가구 매장 직원에게서 받아 온 카탈로그를 훑어보던 여자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책장!”
“필요하긴 한데… 얼마나 커야 하지. 집에 책 많아?”
“요즘은 전자책 많이 사서 우체국 상자 제일 큰 걸로 하나 나올 거 같아.”
“나도 그 정도? 그럼 책장은 천천히 사자.”
석 달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 준비에 여념이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직장 근처에 괜찮은 집이 급매로 나와 이사와 신혼살림 마련까지 함께 진행하게 되었다. 어제는 가전을 보러 갔다. 냉장고는 2도어가 좋은지 4도어가 좋은지, 화구는 인덕션이면 충분한지 가스레인지를 고집하는지, 김치냉장고는 필요한지, 홈 시어터가 로망인지 등등 5년 넘게 사귀면서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주제로 토론을 벌여야 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많은 부분에서 취향이 맞았다. 식재료는 그때그때 쓸 만큼만 사고, 화력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김치는 달에 한 포기 먹을까 말까 했고,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것을 선호했다. 덕분에 가전 매장에서 언성을 높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 여기 온 김에 보고 싶은 게 있는데.”
여자가 골목길 안쪽을 흘끗거리며 운을 띄웠다. 남자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식당 예약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남자의 소맷부리를 잡고 자기 쪽으로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여자가 향한 곳은 오래된 앤티크샵이었다. 편집샵과 팝업스토어가 늘어선 대로에서 골목 하나만 더 들어갔을 뿐인데 이런 가게가 있을 줄이야. ‘OPEN’ 팻말은 걸려 있었지만 안이 어두컴컴해 선뜻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무거운 문을 반쯤 열자 뻐꾸기 시계에서 날 법한 새 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주변을 빼곡히 채운 가구며 소품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가게 안쪽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남자는 통로를 조금씩 침범하는 물건들을 피하기 위해 상반신을 이리저리 뒤틀면서 여자 뒤를 따랐다.
“다행이다. 아직 안 팔렸어.”
여자는 문에 유리를 짜 맞춘 장식장 앞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스듬히 난 천창으로 새어드는 햇살 속에서 반짝이는 먼지가 장식장 위로 내려앉았다.
남자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장식장을 뜯어봤다. 아르누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스타일. 십자 모양으로 유리를 가로지르는 문살에는 물결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고, 장식장 양쪽 귀퉁이를 따라 돋을새김된 포도 넝쿨은 세월의 풍파에도 정교한 만듦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싸겠는데.”
“생각보다 싸. 백화점 이벤트 매장에서 본 장식장 기억나지? 그거랑 비슷한 정도?”
“아, 우리 집에 놓겠다는 거였어?”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남자는 화이트 앤 우드 인테리어를 바탕으로 모던한 가구를 배치한 상상 속 평면도에 눈앞의 장식장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베이지색 패브릭 소파도, 우드 톤의 광폭 마루도, 눈사람 모양을 한 전등도, 산업 디자인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그 의자도 빛을 잃었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거실 전체가 이 장식장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이 머무는 대기실로 전락했다.
“장식장이 왜 필요한데?”
“….”
여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동자가 이쪽저쪽으로 굴러가는 걸 봐서는 하고 싶은 말이 논리정연하게 정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통 이런 데는 비싼 술 같은 거 진열하지 않나?”
술을 진열하더라도 더 세련되고 깔끔한 장식장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아는 한 여자는 술을 즐기지 않았다.
“예쁘지 않아?”
여자는 못내 아쉬운지 손끝으로 장식장을 쓸어내리다가 자물쇠 모양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보기 드문 손잡이에 남자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반대편 문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쥐고 오른쪽으로 가볍게 돌리자 달칵 하는 소리가 났다.
장식장이 진한 월넛색이었다면 더 들어 보지도 않고 반대했을 것이다. 그나마 화이트오크 재질이라 다행이었다. 오래 걸릴지언정 신혼집에 서서히 스며들 테니까. 한 달만 지나면 장식장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는 사실도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남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장식장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이었다.
남자가 아는 여자는 대중적이고 무난한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인간관계에서도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주의였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그들을 묶어 온 ‘편안함’이라는 공단 리본으로 앞으로 살 집을 장식하려고 했다.
여기에 ‘남자가 모르던 여자의 일면’이 먹구름을 드리웠다. 특정한 대상에 대해 욕심을 드러내는 것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취향을 굽히지 않는 것이 처음이었다. 실용성 없는 장식성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처음이었다.
여자는 색색 숨을 고르는 등을 쓰다듬듯이 장식장을 어루만졌다. 앤티크샵,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물건이 모이는 곳. 어쩌면 저 장식장에 무언가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남자는 소름이 돋았다.
“뜨개 실을 잘 보이게 진열하면 예쁠 거 같아서.”
“뜨개질, 좋아했어?”
“응. 사진 올리는 거 귀찮아서 SNS 안 하거든. 그래서 티가 안 났을 거야.”
여자는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샀다고 해도 믿을 만큼 정갈하게 뜬 옷들이 그리드에 맞춰 늘어서 있었다.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은 없었고, 전부 옷걸이에 걸린 옷을 앵글 가운데에 오도록 놓고 찍은 것들이었다. 남자는 휴대폰을 돌려주고는 장식장에 붙은 가격표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여자는 모터 소리가 잦아든 노트북을 덮은 뒤 깍지 낀 손을 머리 위로 쭉 뻗었다. 반쯤 식은 커피가 어서 마셔 달라는 듯이 쌉싸래한 향을 풍겼다. 여자는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커피를 홀짝였다.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쉬폰 커튼, 널찍한 대리석 테이블 위에서 일렁이는 햇살 조각. 이렇게 날씨 좋은 날이면 여자는 이상적인 집에서 사는 행복이 만질 수 있는 형태로 구현되어 두 손바닥 위로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넓이와 실용적인 구조. 하얀 벽지,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가구, 사각거리는 이불, 여자의 동선과 잘 맞는 부엌. 자신의 취향이 온전히 반영된 집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었다. 재택 근무 특성상 집에 있는 시간이 긴 여자에게는 더 그랬다.
“오늘 할 일도 끝났겠다, 간만에 블로그 글이나 올려 볼까.”
여자는 대학교를 다닐 때부터 10년 가까이 블로그를 운영해 왔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지만 가족과 함께 사는 집에서는 큰 모험을 감행할 수 없었다. 여자는 조그만 방을 자기 취향의 데코타일이며 탁상 조명이며 스툴 등으로 채워 넣고는 블로그에 기록해 나갔다. 블로그는 남자와 여자를 이어준 다리이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가 글을 올릴 때마다 ‘그 티슈 커버 예쁘네요. 어디서 샀어요?’ ‘저도 화이트 앤 우드 인테리어 좋아해요’ 하고 댓글을 달았다.
“뭘 쓰지….”
가족과 함께 살던 집에서 나와 이곳으로 이사한 지도 넉 달이 지났다.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휙휙 변하다 보니 블로그에 글을 올릴 짬이 나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대체 어떻게 썼던 거야’ 그동안 글 쓰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것 같았다.
“새로 산 실 사진이나 올려야지.”
여자는 거실 한편에 놓인 장식장 앞으로 다가갔다. 유리창 너머로 보빈에 감긴 실들이 매끄러운 광택을 자랑하며 진열되어 있었다.
별생각 없이 문을 열던 여자가 ‘악!’ 하고 소리질렀다. 검지 두 번째 마디에 빨간색 실선이 나 있었다. 시간차를 두고 빨갛게 피가 배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자물쇠 모양 손잡이에 금이 가서 나무 거스러미가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다. 여자의 눈가에도 눈물이 찔끔 배어 나왔다.
남자에게 말할까, 여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드라이버로 손잡이만 돌려서 뺀 다음 새것으로 바꾸면 되는 문제였다. 그 정도 일로 직장에 있는 남자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생각에 잠겼다. 집 근처 잡화점에서 색깔이 비슷한 나무 손잡이를 본 기억이 있지만, 이 앤티크한 장식장에는 지금 달려 있는 손잡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여자는 금이 가지 않은 반대편 손잡이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자물쇠 모양 손잡이는 열쇠 구멍까지 섬세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공을 들인 장식장이라면 유서 깊은 브랜드에서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본사에 연락하면 새 손잡이를 받거나 얼마쯤 돈을 내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여자는 브랜드 로고를 찾아 장식장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나 오기 전부터 있던 거라 어디 건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