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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Dec 12. 2024

#배고픔에_힘들지_않다면


교복을 행거에 걸고 방문을 열자 갓 지은 밥 내음이 풍겼다. 훈훈한 공기 사이마다 시큼한 김치 냄새가 끼어들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김치찌개인 모양이다. 수민은 간을 보는 엄마의 등에 대고 물었다.


“밥 떠요?”

“그래. 다 뜨고 나면 아빠랑 경민이 부르고.”


수민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대답하고는 밥공기를 네 개 꺼냈다. 맨 위에 있는 밥을 살살 긁어 그릇 가득 퍼 담은 다음 주걱을 깊이 찔러 넣어 훌훌 저었다. 한창 자랄 나이인 남동생은 한 그릇, 밥보다 반찬을 좋아하는 엄마는 반 그릇. 수민은 엄마 눈치를 슬쩍 보고는 주걱을 반도 다 못 덮는 밥을 그릇에 톡 떨어뜨렸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엄마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숟가락을 들려던 엄마는 수민의 앞에 놓인 밥공기를 보고 입꼬리를 비죽였다. 두 입이면 없어질 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기 반찬을 양껏 먹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먹으면 자기 전에 배고플 텐데.’ 그러나 수민은 모두가 잠든 틈을 노려 방에서 군것질을 하거나 야식을 찾아 부엌을 어슬렁거리는 일도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였다. 저녁 식사의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학교에서 먹는 급식까지는 엄마로서 알 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아침 식사의 양은 달라지지 않았다. 밥을 굶거나 식탁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일도 없었다. 건강하다면 건강한 식습관이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밥 좀 더 줄까?”

“계란말이 먹고 있어요.”


그런 것치고는 계란말이를 잘라내는 손길이 느렸다.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고생이란 많든 적든 외모에 관심이 많은 존재다. 수민을 걱정하는 그녀 역시 부모님의 눈을 피해 맥주로 머리를 감고 다 쓴 맥주병으로는 종아리 알을 박박 문질렀다. 하지만 수민은 화장품을 사겠다며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엄마가 산 옷에 토를 단 적도 없었다. 그녀는 여고생의 자존감을 북돋울 만한 칭찬을 고민하며 반찬을 집어 들었다.


가족들이 모두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서야 수민은 방으로 들어갔다. 시계는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7시에 밥을 반 공기만 먹고 10시 반쯤 잠자리에 들면 알람을 맞춘 것처럼 허기가 찾아온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고민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허기와 마주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수민은 가방에서 전자사전을 꺼내 충전기에 꽂아 두고는 집에서만 입는 스웨트 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벗었다. 장판에 맨발바닥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몇 번 나고, 커다란 전신 거울에 껑충한 나체가 떠올랐다.


수민은 젖몸을 떠받치듯이 툭 불거진 갈비뼈를 어루만졌다. 그 아래, 가슴과 배의 경계는 버터나이프 따위로 푹 떠낸 것처럼 움푹 패어 있었다. 쉬는 시간에 엎드려 자는 바람에 남은 책상 자국처럼 보여 조금 웃음이 나왔다.


스웨트 셔츠 소매를 걷자 한 손으로 쥐고도 남는 손목이 드러났다. 여름이 되어 옷소매가 짧아지면 수민은 반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너 진짜 말랐다.” “따로 다이어트 하는 거 있어?” “먹토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거 몸에 안 좋아.” 부러움과 질투와 당혹스러움이 뒤섞인 시선을 받는 일은 마냥 기분 나쁘지 않았다.


수민은 세모나게 틈을 그리는 허벅지 안쪽 살을 꼬집었다. 가느다란 뼈대 위에 뭉클하게 붙은 살덩이가 손바닥에 들어찼다. 마른 몸과 어울리지 않는 뱃살도 말랑했다. 아이돌처럼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만하면 귀엽지 않나 하는 생각 위로, 이렇게 볼품없는 몸을 누가 사랑해 줄까 하는 참담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수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덮어 가리듯이 서둘러 속옷을 꿰어 입었다.


마침 전자사전 충전기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수민은 전자사전을 펼쳐 맨 위에 있는 메모를 열었다. 오늘은 지원이 무슨 글을 썼을까.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극과 재구성된 타인의 이미지 없이 온전히 자기완결적으로 작용하는 자위는 존재할 수 있을까.” 첫 문장을 읽는 수민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수민은 자세를 고쳐 앉고는 작고 네모난 글씨들을 시야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지원과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사소한 일로 친해져 함께 문예부에 들어갔지만, 2학년이 되어 지원이 이과를 고르면서 반이 갈렸다. 이과 공부에 전념한다는 이유로 문예부까지 그만뒀다. 그렇다고 해서 글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자습 시간 틈틈이 전자사전에 쓴 글을 서로 돌려 보면서 둘만의 합평회를 이어 왔다.


원래는 어제 완독한 《향수》 감상문을 쓸 생각이었지만, 지원의 글을 읽는 동안 쓰고 싶은 내용이 생겼다. 수민은 테디 베어가 그려진 머그컵에 따뜻한 물을 받아 온 다음 전자사전의 조그만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렸다.




하교 시간을 알리는 차임이 울리자 걸상을 박차고 일어나는 소리가 벌떼처럼 들끓었다. 책가방 지퍼를 잠근 수민은 이과반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을 받쳐 입고 후드 집업을 걸친 지원이 교실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났다.


두 사람은 눈짓을 교환하고는 소각장이 있는 학교 뒤편으로 향했다. 으슥한 덤불 사이에 두 사람이 바투 붙어야 겨우 앉을 수 있는 크기의 바위가 놓여 있었다. 그곳이 두 사람의 원탁이었다.


“자. 졸려서 길게는 못 썼어.”


지원은 전자사전을 펼치다 말고 수민의 안색을 살폈다.


“내가 쓴 글은 괜찮았어? 써도 되나 고민 많이 했는데.”


수민은 글에 몇 번이나 등장하던 ‘자위’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갈비뼈 안쪽이 근질거렸다. 수민은 손을 뻗어 전자사전을 탁 소리 나도록 덮었다. 동그래진 지원의 눈동자가 수민의 손과 얼굴을 오갔다.


“너 나랑 처음 이야기한 날 기억나?”

“야,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

“난 기억하는데.”


당당한 말투에 지원은 앓는 소리를 흘리며 기억을 끄집어내려 애썼다.


“인절미 먹은 날.”


수민의 말에 지원의 입이 벌어졌다.


작년 여름이었다. 두 사람과 같은 반이었던 학생이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 꽤 큰 상을 받았다. 말없이 넘어간다 한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겠지만, 학생의 부모는 방앗간에서 떡을 주문해 교실로 가져다 주었다. 상자를 열고 투명한 비닐을 걷어 내자 노르스름한 인절미가 뜨거운 김을 내뿜었다.


집 냉동실에 굴러다니는 떡은 본체만체했을 테지만 친구들과 학교에서 먹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0교시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나느라 버석해진 얼굴 위로 홍조가 감돌았다. 담임 교사는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인절미를 잘라 일회용 그릇에 담고는 각 분단 맨 앞자리에 앉은 학생에게 건넸다. 일회용 그릇이 손에서 손으로 넘겨졌다.


“선생님! 지원이 거 없어요.”

“걔는 어차피 다 먹고 나서야 올 거잖아.”


담임 교사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빈 상자를 챙겨 교실을 나섰다.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보육 시설에서 지내는 지원은 월, 수, 금요일마다 우유 배달을 하느라 1교시 수업 종이 울릴 때나 등교했다. 형편상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과 못처럼 비죽 튀어나온 존재에서 아니꼬움을 느끼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민은 손수건으로 일회용 접시를 덮었다.  그래 봤자 지원이 등교했을 때는 훈기는 온데간데없이 귀퉁이부터 조금씩 굳기 시작한 떡이 놓여 있었지만. “먹을래?” 수민이 지원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맞아, 그랬지. 배고픔을 거의 못 느낀다고 했잖아.”

“이제 읽어 봐.”


수민은 엷게 미소 지으며 전자사전 위에 얹은 손을 치웠다. 지원은 첫 문장을 천천히 읊조렸다.


“누군가는 배고픔에서 성적인 흥분을 느낀다. 그곳에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도, 상상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휭 하고 불어온 높바람에 매캐한 재 냄새가 섞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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