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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Dec 05. 2024

죄, 책감

#누가_피해자인가


걸그룹 출신 배우 J의 자살 소식은 며칠째 포털 사이트 첫 페이지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유서에 적힌 원인은 오랜 우울증이었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진짜 원인은 몇 달 전 인터넷에서 나돌기 시작한 섹스 영상이라는 사실을.


J가 죽은 것은 나 때문이다.


유출될 것을 걱정하면서 섹스 영상을 찍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보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싶다는 말로 설득했다.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정이 씻는 동안 삼각대로 세운 휴대폰을 침대에서 멀찌감치 떨어트리고는 침대 헤드 쪽을 비추지 않도록 살짝 틀었다. 녹화 화면을 확인한 정은 피식 웃기만 할 뿐 휴대폰은 건드리지 않았다. 스타 PD이자 유부남인 정이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뻗대면 이 영상으로 협박을 할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다음 날 정의 온기만 남은 침대에 누워 영상을 확인했다. 다행히 내 얼굴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불안했던 나는 영상을 돌려 보며 말하는 부분을 모두 잘라냈다. 정의 이름을 부르는 부분은 남겼다. 자신의 신음을 듣는 일은 몸이 뒤틀리는 듯한 고역이었지만 몇 번씩 듣다 보니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제법 그럴싸한데?’ 정에게는 녹화 버튼 누르는 것을 깜빡했다고 말했다.


그게 어쩌다가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게 되었을까. 휴대폰을 바꾸면서 대리점에 데이터 백업을 부탁한 적이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쓰다가 공개 범위를 잘못 설정했을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어 달라며 남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 주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범인은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일반인’ ‘몰카’ 따위의 꼬리표를 달고 이리저리 떠돌던 영상은 눈썰미 좋은 누군가에 의해 J의 이름이 붙었다. 날개뼈에 있는 레터링 타투 때문이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문장이었다. J는 데뷔 초부터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애정을 자주 내비쳤다. 여름이 다가오면 가벼워지는 무대 의상이 J의 타투를 한 글자씩 내보였다.


한번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J를 유추할 수 있는 증거가 지금까지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줄줄이 딸려 나왔다. 늘씬하게 뻗은 종아리 라인, 무릎에 난 점, 축구 유니폼 소매 라인대로 난 그을린 자국.


나 역시 조기 축구가 취미고, 직업 특성상 아이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 않게 몸매를 가꾸고 있다. 무릎에 난 점은 이십몇 년 동안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댓글을 보자마자 바지를 걷어 확인했다. 꼭 같은 자리에 있었다. 점은 아니고 벌레 물린 자국이.


날개뼈의 타투. J의 오랜 팬이었던 나는 술김에 타투샵을 찾아가 J의 수영복 화보 사진을 내밀었다. J는 배우로 전향하면서 타투를 지웠지만 나는 타투를 지울 이유가 없었다.


정이 유부남만 아니었으면 사람들은 그 영상의 존재를 쉬쉬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왜 찍었든 간에 J는 영상 유출 범죄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 J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들에게 이번 영상은 공인으로서의 결격 사유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일 뿐이었다. 영상은 초 단위로 쪼개져 텍스트 형태로 전시되었다.


불릿까지 달아 가며 영상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포스트 중 하나를 골라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딱히 J만 싫어하는 것은 아닌지 원로 배우부터 틱톡커까지 온갖 이들에 대한 인상 비평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크롤을 몇 번 내리자 몰카 피해자에 대한 지원 정책을 홍보하는 게시물의 리포스트가 나왔다.


생각난 김에 구글 검색창에 J의 이름을 쳤다. 세 번째쯤에 ‘J 섹스 영상’이 나왔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J 대표작’을 검색했다.


정은 비난의 화살을 가뿐하게 피했다. 영상이 찍힌 시점은 이혼 숙려 기간이었고 아내와도 별거 중이었다는 증거를 내놓은 것이다. 이혼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쑥 들어갔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불륜이라는 법적인 낙인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알았다면 굳이 그런 영상을 찍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 창을 꺼야 하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에서 J의 이름을 검색했다. 인스타그램과 X와 인물 갤러리를 옮겨 다닌다. 자물쇠가 걸려 있거나 가입이 필요한 곳도 J 이야기로 뜨겁겠지만 거기까지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저거 J 아닌 거 같은데? 발목 라인이 좀 다름’


J가 자살하자 지금까지 비난에 떠밀려 겨우 자맥질이나 하던 의견이 하나둘 고개를 디밀었다.


나는 인터넷 창을 옆으로 치운 뒤 바탕화면에서 J 이름으로 된 폴더를 클릭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미지 파일과 앳 마크로 빼 놓은 영상 파일. 원하는 이미지 파일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짤막하게 댓글을 쓰고 이미지 파일을 첨부했다.


‘200215_쇼음악중심_발목_상처+라인.jpg’


J가 죽은 것은 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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