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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정 Nov 26. 2024

마음의 근육을 기르는 생활

상처를 주는 것들에 대한 온건하고 정중한 거절

술을 끊었다.

맥주가 생각나면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레몬즙을 생수에 넣어 마셨다. 도대체 어디서 레몬즙이 나타났는지 의문이었다. 김해경이 미치지 않고서야 냉장고에 솔리드 스퀴즈드 레몬즙 같은 걸 사놓았을 리 없었다. 김해경의 옷장에 처박혀있던 검은색 스타킹의 주인이 몰래 집에 들어와 두고 간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김해경의 여자친구나 전 와이프와 셋이서 동거할 자신은 없었으므로 내심 그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밤늦게까지 침대에 모로 누워서 반딧불이처럼 보던 유튜브를 끊었다.

처음에는 불편하기만 하던 적막이 곧 깊은 일기장으로 변했다. 나중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진공이 되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으면 사막의 오로라처럼 잠이 쏟아졌다.


아주 약간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커피를 들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쓰고 있는 장편 소설의 오래된 문단을 고치거나 새 문장을 만들거나 낯선 단어를 끼워 넣고 출근했다.


회사에서 주워 먹던 과자를 끊고, 저녁 식사를 탄수화물에서 채소로 바꾸었다.

필요 이상의 열량으로 무거웠던 몸에서 불안과 죄책감을 덜어냈다. 나른하고 텁텁하고 자극적이고 일시적이고 불유쾌했던 감정의 추가 찬찬히 중심을 잡아갔다.  


퇴근 후 모임 대신 운동을 택했다.

매일 삼십 분씩 온몸으로 땀을 흘리며 가장 가시적이고 근접하고 확실한 성취감을 골랐다.


사람들이 수시로 바꾸는 카톡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대신 나를 궁금해하기로 했다.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번호를 지웠다.

나를 찾지 않는 상대에게 덤덤해졌다.


내게 상처를 주는 모든 것들에 대한 온건하고 다정하고 정중한 거절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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