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던 봄, 여름을 보내고 가을로 접어들며
나는 조금씩 심리적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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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다른 시련의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즈음 신랑과 밤마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는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으로 산과 공원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이다. 산책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는 것을, 집밖으로 나서서 공원의 흙을 밟아보는 게 얼마만인지.
원래 체력이 좋잖은 탓에 늘 빠지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이런저런 운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진 후부턴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회사에서 오전 근무를 간신히 마치고 오면 방 안에서 몸을 꽁꽁 싸맨 채 어두운 시간을 견뎌내는 것만도 버거웠으니까.
근 반년만에야 그 기억들을 떨쳐내고 내딛는 작은 한발. 그동안 무너져 내린 마음의 근력을 하루라도 빨리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아이들의 숙제와 학습을 챙긴 뒤, 신랑의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나섰다. 산책 내내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신랑이 거기 있다는 실감을 몇 번이고 다시 하면서.
마음이 고됐던 시간 동안 여러 가지로 신랑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만나 이제 마흔 중반으로 향하는 그 긴 시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옆에 있어준 사람. 늘 옆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해 왔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는 아프면서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 남짓 우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녁마다 집을 나섰다.
그날도 공원을 천천히 서너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내 놀이터로 들어서던 중 조금 뒤처진 신랑과 걸음을 맞출 생각에 뒤로 몸을 틀었다. 순간 왼쪽 종아리에서 투둑, 하고 옷의 실밥이 뜯어지는 듯한 느낌이 스쳤다. 하지만 다리를 움직여보니 예의 그 부분이 조금 따끔하긴 해도 걷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때문에 나는 '오늘 약간 무리했나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가버렸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며칠을 보내는 사이 다리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결국 따끔하던 것이 뜨끔해지고서야 회사 근처 병원으로 찾아갔고, 초음파를 본 의사는 미세근육파열이라며 2주 정도 반깁스와 물리치료를 권했다.
이삼주 정도 치료받으면 될 거라는 의사의 심상한 말에 나는 별생각 없이 일상생활을 계속했다. 깁스를 한 채로 출퇴근을 하고 여느 때처럼 집안일을 했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탓인가 다리는 잘 낫지 않았다. 2주 후에도 여전히 다리가 아프다고 하자 의사는 한 주 더 깁스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3주 뒤에도 다리는 낫지 않았다.
종종 그때를 떠올리며 후회 아닌 후회를 한다.
그때 다만 며칠이라도 병가를 내고 푹 쉬었다고 어땠을까.
아니, 그날 아예 운동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결국 다리를 다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절뚝거리며 동네 한의원으로 향했다. 근방에서는 제법 유명하다는 곳이기도 했고 집과 가까워 치료받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상황을 얘기하자 한의사는 깁스를 왜 그렇게 오래 했냐며 혀를 찼지만, 나는 그때까지만도 그게 큰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 꾸준한 치료 덕인가 다리상태는 차츰 좋아지고 있었다. 두어 달 치료를 받자 걸을 때도 더 이상 다리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걸을만해지자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어두운 심연을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마음이 재차 가라앉기 전에 나는 얼른 몸의 컨디션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그때 나는 3년째 시선제로 근무하던 중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올해를 마지막으로 내년과 동시에 사직이닷!'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겠지만, 연초 예기치 못하게 맞은 공황으로 나의 퇴사계획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하지만 퇴사의 꿈은 접었을 망정 소설가로서의 꿈은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현실인으로서 회사를 그만둘 순 없다 해도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건 나를 버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사정으로 글은 잘 써지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고단하고 시간은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간절히 휴직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시의 자기계발휴직 시행 여부는 불투명했고, 어느 순간부터 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면서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조차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때 마침맞게 가사휴직 개정 소식이 들려왔다. 기존에 있던 가사휴직이 가족돌봄휴직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가족의 병간호뿐만 아니라 부양, 돌봄 등의 사유로도 휴직신청이 가능해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자녀의 질병이 아닌 돌봄을 위해서도 휴직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다음 날 가족돌봄휴직에 대한 문의를 위해 행정과에 업무통신을 보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두어 시간 뒤 담당자로부터 답신이 왔다. 나는 아직 둘째가 만 8세 이하라 둘째를 대상으로 한 돌봄 사유로 휴직사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신랑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장님과 동장님에게 휴직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2월,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휴직을 신청한 나는 너무나도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원래 계획보다 삼 년이나 늦어버렸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이제 희망찬 미래가 바로 눈앞에 놓여 있으니까.
휴직 기간 동안 열심히 체력을 끌어올려 건강을 되찾고, 코로나로 야외활동이 제한되었던 아이들과 여행도 많이 다니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 한 해 동안 글로써 무언가를 꼭 이루고 싶었다. 새로 마련한 빳빳한 다이어리 위에 한해 계획을 꼼꼼히 적어나가며 나는 새로운 희망에 한껏 들떴다.
그때까지만 해도 간신히 얻게 된 귀한 시간을 병원 투어로 채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