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보통은 성향상 나와 아이들(엔프피) 대 신랑(잇티제)의 3:1 구도가 형성되곤 한다. 하지만 이 경우만은 예외이다. 이럴 땐 요렇게 나뉜다. 신랑과 아들들 대 나, 즉 '이 세상 음식 중 라면을 가장 좋아하는 자'와 '그냥 라면을 좋아하는 자'.
그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우리 집 남자 셋에게 라면은 하나의 진리이자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그 무엇이다.
작년 중등 2학년에 접어들며 중학교 들어 첫 시험을 칠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혼자 애가 달았었다. 시험기간이 다가왔으나 공부 비스무리한 것도 안 하고 팽팽 노는 첫째. 그런 녀석을 그냥 보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첫 시험인데'. '나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며칠을 지켜보다 도저히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나는 묘안을 냈다. 아들에게 상품을 내건 것이다. 조금이라도 공부에 의욕이 솟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에서였다.
"아들! 너 전교 1등 하면 엄마가 너 원하는 거 하나 사 준다."
"정-말?"
"정말이지. 그래, 뭘로 할래?"
"음..........."
잠시 고민하던 아들은 이내 고민을 끝내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김치왕뚜껑 한 박스!!!"
"....뭐, 뭣? 진짜?"
"당근이지! 유휴~~"
그러면서 아들은 이미 라면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듯 온갖 세리머니를 하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 김치왕뚜껑 한 박스라도 놓여있는 듯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ㅡㅡ;;; 아, 아들 반에서 아니고 전교 1등이라고!
나는 어이없이 아들을 쳐다봤지만 녀석의 정신은 이미 딴 세계로 가 있었다. 저 넘어 어딘가 존재할 꿈의 라면동산으로. 그저 공부에 대한 의지를 조금 북돋아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저토록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이야. 내 아들이지만 정말이지 독특한 녀석.^^;
물론 그렇다고 그 공약 때문에 딱히 아들이 더 열심히 공부를 한 건 아니다. 아들은 누가 뭐라든 자기 페이스대로 가는 녀석이니까. 디스 이즈 마이 웨이~~~.
그러나 내 보기엔 어설프고 답답해 보이지만, 사실 저도 첫 시험이라 시행착오를 거치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하나씩 배워나가는 수밖에 다른 지름길은 없으니까. 그렇게 생전 처음 노트정리도 해보고 기출문제도 풀어가며 아들은 아들 나름 시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하던 녀석도 긴장을 했던지 시험 첫날 저녁 갑자기 열이 펄펄 끓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해열제를 먹이고 간신히 열이 내려 다음날 학교로 태워다 주며 나는 시험 공약 따위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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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걸, 시험이 끝나고 얼마 후였다. 아들이 의기양양하게 현관문을 들어서며 말했다.
"엄마, 나 약속한 대로 김치왕뚜껑 한 박스~~~"
"뭐? 서, 설마....."
"앙, 선생님이 내가 전교 1등이래."
하, 하하. 아들, 너 정말 1등을 해버렸구나. ^^;;;;;;
그리하여 신랑에게 얘기해 당장 쿠팡 아침배송으로 김치왕뚜껑 한 박스를 주문했다.
다음 날 아침, 아들은 눈을 뜨자마자 문 앞에 도착해 있는 라면박스를 안고 들어오며 입이 함지박만 해져 있었다. 라면이 그리 좋으냐? 그래, 그 피가 어디로 갈까.
사실 우리 집에서 가장 라면을 사랑하는 이는 신랑이다.
결혼 전까진 그저 자주 먹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신랑이 라면을 자주 먹는 것은, 그냥 밥 대신 간단하게 한 끼 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짜 너무너무 좋아해서라는 걸.
신랑에게 라면은 별미이자 특식이다. 밥을 실컷 먹고 나서도 웬만해선 라면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삼시 세끼 라면만 먹고도 1년을 거뜬히 살아낼 사람이 바로 우리 신랑이다. 그런데 그런 취향을 첫째도, 둘째도 똑같이 빼다 박은 것이다. 그런 건 어디 유전자에 턱 하니 박혀 있기라도 한 것일까.
게 중에서도 첫째의 라면 사랑은 한계가 없다. 어쩌면 언젠가 제 아빠를 능가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교환가치의 기준에 라면이 있고, 라면이면 뭐든 꼬실 수가 있다. 이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해 보기로~
아무튼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는 라면이 종류별로 있다. 보통 구비해 두는 것은 신라면, 안성탕면, 짜파게피, 사천짜파게티, 비빔면, 라면사리 정도인데, 종류별로 한 팩씩이 아니고 박스채로 주문해 둔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쿨럭).
애들 어릴 때는 어떻게든 라면을 안 먹이려고 기를 썼었다. 하지만 이제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신랑이 더한 걸 어쩌겠는가. 어른이 모범을 보이지 않는데 아이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소용없으니까. 대신 밥은 꼭 먹고 그래도 더 먹어야겠다면 허락하고 있다. 그렇게먹다 보니 나는 정말이지라면이 물려버렸다. 나도 라면 정말 좋아했었는데, 이 라면쟁이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럴 땐 진짜 아들 셋을 키우는 것 같기도.ㅡㅡ
첫째의 찐라면 사랑에 대한 웃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작년에 녀석은 반년 남짓 화상영어로 필리핀 선생님과 수업을 했었다. 영어학원도 안 다니고 집에서 영어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이거라도 하라고 억지로 떠민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처음에 녀석은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선생님과 가벼운 대화를 하기 시작하더니 이따금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집안일을 하며 살짝살짝 엿듣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아들에게 꿈을 물었다.
"브루스(아들의 영어별명이다), 너는 꿈이 뭐니?"
그러자 아들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수학자가 되고 싶어요(아들의 최애 과목은 수학이다). 피타고라스 같은....."
오오! 선생님의 가벼운 감탄음 뒤로 수줍게아들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성공하면 서재의 책장 가득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라면을 하나씩 다 진열해 놓고 싶어요."
자지러지는 선생님의 웃음소리. 설거지를 하던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넘의 라면사랑. 그래, 역시 우리 아들답네.
그러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왜 세상에 건강에 좋은 라면은 없는 것일까? 라면이 건강에 유익하다면 마음의 부채 없이 실컷 라면을 먹일 텐데... 그러다 불현듯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