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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니오 Apr 09. 2024

청소의 감각.


신랑은 양말이 참 많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많다. 옷장 서랍 한 칸이 똑같은 양말로 가득 찬 정도니까.


게 중에는 신던 것도 있지만 새것도 제법 된다. 우리가 주로 이용하는 쇼핑몰 **샵에서 종종 사용가능한 적립금을 주곤 하는데, 그때마다 똑같은 양말만 몇 년간 주문해 왔기 때문이다. 무료배송이라 적립금을 빼면 5족에 삼천 원대라 가성비도 최고인 신랑의 회색양말.




하지만 같은 양말을 이토록 많이 주문한 이유는 적립금 때문도 가성비 때문도 아니다. 그건 내가 신랑 양말을 잘 빨아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혼 초부터 신랑 양말은 따로 빨래바구니에 넣어 제법 모였다 싶으면 한꺼번에 빨곤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슬금슬금 그 간격이 늘어나기 시작하다 급기야는 그만 깜박 잊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아침에 "내 양말~~!" 하는 신랑의 절규를 듣고서야 나는 아차 했다. 양말이 양말통에 다 들어가 당장 신을 양말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이 몇 번 벌어진 이후, 신랑은 양말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내가 깜빡하고 빨지 않아도 다급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내가 빨래통 가득 넉넉히 양말을 모아빨아도 문제 되지 않도록. 그렇게 하나씩 둘씩 쌓이기 시작한 양말이 어느새 서랍 하나를 가득 채워버렸고, 이제는 신랑이 평생 신을 양말을 비축하게 되었다.


오해는 마시라. 세탁기는 거의 매일 돌린다. 활동량 쩌는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까. 위의 예는 단지 신랑의 양말에 한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청소와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아니, 잘 못한다.  게을러서? 청소를 싫어해서? 뭐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청소에 대한 감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나는 청소에 관해서라면 한껏 관대해지는 타입이라고나 할까.




신랑과 나는 청소나 정리에 대한 감각이 좀 다르다.



엔프피(ENFP)인 나는 그래도 정리는 좀 하는 편인데, 청소는 썩 잘하지 못한다. 깔끔하다, 아니다의 차이가 아니라 청소에 대한 민감도가 남들에 비해 매우 떨어진다는 거다. 한마디로 웬만해서는 별로 청소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남들이 보기엔 조금 지저분할 상황에도 '이 정도면 아직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조금 더 있다 해도 충분해.'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넘어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금은 설거지는 웬만하면 식사 후 바로바로 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한 번에 한 적도 많았다. 아침에 애들 밥 먹이고 퇴근 후 저녁까지 먹고 나서 한꺼번에;; 그러다 보니 저녁이면 4인 가족의 설거지거리가 개수대에 산을 이루었다. 그릇이란 그릇, 수저란 수저는 죄다 나와서 물 한잔 마시려면 컵이라도 하나 씻어야 하는... 흠흠. 너무 지저분해서 죄송합니다.


청소도 비슷하다. 구석에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몽글몽글 뭉쳐있어도 내 눈에는 잘 안 들어온다. 내 관심사, 내 레이더에는 잡히지 않는 것이다. 설령 어쩌다 눈에 들어온다 해도 딱히 거슬리지 않는다면 이내 다른 데로 눈이 돌아간다. 그러면 또 금방 잊어버린다.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좀 그렇다.


하지만 그런 나도 잠시잠깐 청소에 진심인 적이 있었다. 애들이 어릴 때 아토피에 알레르기까지 있던 터라 본래의 성향에 맞지 않게 한동안 유난을 떨기도 했지만, 애들이 좀 크고 나자 다시 원래대로 회귀해 버렸다. 그렇지 뭐.ㅋ


나와는 반대로 잇티제(ISTJ)인 신랑은 꼼꼼한 성격만큼이나 깔끔한 편이었다. 그나마 신랑이 청결에 민감한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서로 크게 부딪힐 일은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가령 빨래를 널고 나온 신랑 뒤로 보이는 빨랫대 위 각 대마다 정확히 딱 반으로 접혀 4열 종대 줄을 선 채 널려있는 수건들을 보거나, 개고 난 빨래들이 각이 잡혀 네 귀퉁이가 딱 맞게 접혀있다거나 하는 것을 볼 때 같은. 대충 널어도 마를 텐데 굳이 저렇게까지? 결벽증인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러던 우리가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이십여 년이 지나며 우리의 청소에 대한 감각이 비슷해진 것이다. 서로 은연중에 절충점을 찾아가며 맞추다 보니, 어느 순간 평준화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늘 그렇듯 평준화는 주로 상향보단 하향으로 가는 지라 신랑의 청소에 대한 감각은 하향평준화되었다. 설거지가 조금 쌓여 있어도, 빨랫감이 빨래통을 가득 채우고 있어도, 방바닥으로 먼지가 굴러다녀도 신랑의 시선은 잠시 머물다 이내 무심히 다른 곳으로 향한다. 나야 원래 그랬지만 수건을 각을 세워 널던 신랑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가끔 궁금해진다(너저분함에도 내성이 생기는 걸까. 어쩌면 나와 살면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생존전략일지도.).






언젠가부터 우리 집 청소 담당은 신랑이 되었다. 나보단 신랑이 더 잘하는 일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정해졌다. 그런 연유로 일주일에 한 번 쓸고 닦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건 신랑의 몫이다. 하향평준화되었다고는 해도 한번 할 때는 제대로 하셔야 하시는 잇티제는 각종 청소용구를 구비중이다. 로봇 청소기는 물론, 유선 청소기, 무선 청소기, 물걸레 청소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어차피 나의 소관도 아니고, 평소 쓸데없는 데 낭비하지 않는 신랑이라 청소용품을 자꾸만 사들여도 그저 나는 입틀막!


청소에 관해서라면 엔프피는 할 말이 없다. 아내이자 엄마로서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노력은 하지만, 한계가 분명히 있다. 대신 나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에 집중한다. 멋들어지게 꾸며진 인테리어나 정갈한 살림살이는 못 하더라도 식구들 삼시 세 끼는 꼭꼭 챙긴다. 맛있게 먹어줄 가족들을 생각하며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입에서 룰루랄라 노래가 절로 나온다. 하루의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이다.



우리집의 평화로운 풍경의 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있다. 서로의 부족함을 탓하고 질책하는 대신 각자의 성향이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서로의 단점을 고치려 하는 대신 서로가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다. 물론 우리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함께해 오며 터득한 것이다내가 얼렁뚱땅 마무리해 놓은 집안일을 말없이 단정하게 마무리 짓는 신랑의 마음을 알고 있다. 이따금씩 혼자 틀어박혀있고 싶어하는 신랑을 위해 조용히 방문을 닫아준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의 시간은 점점 더 무르익어간다. 햇살과 바람 속에 탱글탱글 영그는 달디 단 과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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