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 중 하나는 신랑의 듬직한 등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우리는 거의 매일 술자리를 만들었고, 술을 먹고 떡이 된 친구들을 하나하나 택시에 태워 보내곤 하던 그의 뒷모습. 그것을 보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신뢰는 여전히 변함없다. 말수는 적고 간지러운 말 따윈 잘하지 못하지만, 말없이 은근하게 챙기는 츤데레 같은 신랑. 늘한결같은사람.
ISTJ를 검색하면 현실적, 책임감, 성실함, 신뢰, 꼼꼼함, 보수적(가부장적) 같은 말들이 가장 먼저 나온다.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인 ISTJ는 세상의 소금형으로 불린다. 규칙을 준수하고 일관성과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며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솔직, 과묵하며 감정 공감에 약하다. 표정관리를 잘하지 못해(본인은 무표정이라는데 남들이 보면 화난 표정;;) 오해도 종종 받지만 마음은 따뜻한 편이다. 한마디로 융통성 없고, 재미없는 공무원 스타일.
그에 비해 ENFP인 나는, 스파크형. "살짝 미치면 인생이 즐겁다" 란 모토의 낙천적인 몽상가로 호기심이 많아 관심사가 다양하지만 한번 꽂히면 잘 빠져든 만큼 흥미를 잃는 것도 금방(그래서 용두사미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는 경향이 있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잘 맞추며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반복적인 업무는 극혐. 눈치는 없으면서 눈치는 많이 보는 편.
신랑은 극현실주의자, 나는 초현실주의자.
ISTJ는 겉으로 보면 정 없고 냉정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사람들한테는 지극하다. 가부장적인 면 뒤엔 가족들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있는 것. 회식을 좋아하지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즐기지 않는다. 언뜻 정말 재미없게 사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본인은 혼자 조용히 쉬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 이유로 매일 칼퇴 후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쓸데없는 데 눈을 돌리지 않는다. 적어 놓고 보니 가장으로서 이보다 더 든든한 성향이 어디 있을까 싶다.
나는 가만 두면 하늘로 자꾸만 떠오르려고 하는 풍선 같은 경향이 있다. 그런 내 옷자락을 붙잡아 당기며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살살 조절해 주는 게 우리 신랑이다. 내가 너무 땅에서 멀어지지 않고 현실에 발디디고 설 수 있게 옆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어 주는 사람. 내가 뜬구름처럼 둥둥 뜬다고 가끔 타박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주며 늘 변함없이 지켜봐 주는 사람.
그러나 '변함없음'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따금 신랑과의 대화 중 내가 지금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벽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갑갑할 때가 있다. 신랑의 무표정한 얼굴과 무심코 툭 던진 한마디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상처받기도 한다. 삼십 년 가까이 서로에게 맞추어 왔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니까.
사실 원체 성향이 다른 탓에 일상생활에서 종종 서로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물건 하나 구매하는데 비교분석하느라 하세월인 신랑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본인은 신중한 거라고 말한다;;), 신랑은 최저가 검색도 제대로 안 하고 급하게 구매해 버린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사실 검색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신랑은 용케도 더 저렴한 걸 찾아낸다;;;). 내가 툭 던져놓은 물건을 신랑은 지나치지 못하고 정위치로 옮겨놓는다. 가끔은 고루한 신랑이 재미없게 여겨지기도 한다. 복작한 걸 싫어하는 신랑 덕에 사람 많은 곳에 가기도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수월찮다.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꽤나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절충점을 찾아간다. 신랑은 깔끔함과 정리정돈에 대한 기준을 낮췄다. 이제 적당한 어수선함 속에서도 편안히 보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어느새 신랑처럼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주말에도 잘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무르는 때가 많지만 한 공간 안에 네 식구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낀다. 맛집 투어를 다니는 대신 가족들이 좋아하는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사랑한다. 집밥을 좋아하고 집안에서 자유로이 각자 원하는 대로 쉬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들의 일상은 남들이 보기엔 조금 심심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속에서 안락함과 평온함을 느낀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조금씩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