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따뜻하고 잔잔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에세이 작가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수없이 많은 생각들과 일상의 잔잔한 감상들이, 카카오스토리에는 다 담지도 못할 좋은 문장들이,
미쳐 쓰지 못해 삼켜진 글귀들이 아쉬웠다. 음식을 하며, 염색을 하며 업무를 하며, 캠핑을 하며 노래를 부르며 책을 읽으며 기도를 하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면 작가가 되어야지. 나에게 어울리는 다른 job을 꿈꿔보며 퇴근 후 집으로 향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남기고 있는 삶의 자국은, 우울하다. 체할 것처럼 급하다. 빨리 뱉어내고 싶은 사람처럼 미친 듯이 써 내려가고 있는 글들.
허나, 어찌 삶의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 만이 옳은 것이겠느냐.
슬픔과 괴로움. 고통과 우울, 두려움과 분노. 이러한 감정도 보통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삶의 일부분이고
나는 오늘도 글로써, 이러한 감정들을 잘 버무리고 소화시켜보겠다.
밝고 긍정적이며, 인내심이 강한 성격인 나에게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3년 전 그 증상은 나를 충분히 당황케 했다. 나는, 남편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또한 사랑하려고 무한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아님 내가 선택한 결혼에 대한 최선을 다함으로써 '나는 잘 살고 있고, 살아내고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27살이던 2006년도. 부부싸움의 장면이 기억이 났다.
"야, 내 누나들은(남편은 누나가 세명이다) 아무리 싸워도 남편 밥은 차려준다. 여자가... 여자가 어쩌고 저쩌고...."
아내들은 이 대목에서 2가지 선택을 하겠지. '아니, 요즘 세상이 어느 때인데, 여자가 여자가 하는 거야. 당신은 손이 없냐? 나 아기 돌보느라 힘든 거 안 보이냐? 나는 직장 안 다니냐? 당신이 나에게 밥상을 차려주면 왜 안되는데? 설거지도 왜 내 몫인데? 왜왜왜?' 또는 ' 네.. 싸워도 밥은 잘 차려드릴게요. 수저도 놔드리고, 물컵도 가져다 드릴게요. 당신이 미운건 아니니까요.'
^^헛웃음이 난다. 2가지 선택이라는 선택지는 설정이 잘 못된 거 같다. 후자의 선택은 너무 개연성이 부족하다. 일단 서로 의견을 충분히 나누고, 충돌하고 절충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친 후 후자의 선택을 한다면 맞는 말이겠지.
그러나 나는 참 이상한 선택을 했다. '드럽고 치사해도 내 할 일은 다 하자' (그날 남편의 얼굴은 무서웠고, 나는 두려웠다.) 나는 평화주의자였을까, 회피형 성격장애일까, 아니면...(이 상황에 적당치 않은 표현 같지만) '어설픈 완벽주의자'였을까. 내 결혼생활에 소음과 잡음을 만들기 싫었고, 나는 잘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고,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 '완벽해지고 싶다'는 소망이 내 삶을 기형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평화주의와 갈등을 회피하고 싶은 성격이 기름을 부었는지도....
아무튼 옛날이야기는 접고, 3년 전으로 돌아가면
그날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실체를 드디어 온몸으로 경험했던 것 같았다.
좋은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나 보다 나은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없는 면을 채워주고 있던 그 사람에게 고맙기도 했었다. (단단함, 고집스러움, 절약정신과 절제,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음 등등)
그날 결혼 15년 만에 드디어 벗겨진 콩깍지는, 본인의 아픔과 슬픔만 보이고 아내의 희망과 절망은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막내아들 그 자체였다. 나. 는. 내 삶을 즐겨야 하니 아이를 안 낳겠다고 하지 않았고, 하나만 낳고 둘째는 낳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으며, 회사에서 승진을 해야 하니 셋째를 안 낳겠다고 하지 않았다. 낳은 아이라도 잘 키우고 싶으며 곧 마흔이라 아이 낳고 키우기가 체력적으로 너무 힘드니 넷째는 않낳겠다고 하지도 않았다. 이미 나는 네 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며 직장생활과 가사, 육아를 온몸으로 감당해내고 있는 멀티 슈퍼 우먼이었다. 그런 내가 다섯째를 안 낳겠다고 버티고 있는 게 '이혼'을 당할 일이더냐.
나는 그 남자의 괴로움을 보듬어줄 마음의 방이 없었고, 오히려 그 마음의 방안에는 실망과 분노가 가득 찼다. 다시는 이런 사람 때문에 호흡곤란이나, 온몸이 쭈뼛서는 경험 또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나는 이제 당신이라는 사람의 본질을 너무 잘 알아버렸으니까!
최근 한참 사춘기인 둘째 아이와 남편의 계속되는 충돌에 우리 가족 모두 지쳐있었다. 한번 시작되면 3시간이나 계속되는 훈계와 반항의 대격돌... 아이가 집을 뛰쳐나간 적도 몇 번이고 핸드폰을 뺏고 돌려받기를 수차례. 용돈이 끊기고 지급되기를 반복되는 아주 지리지리 하고 지치는 날들이었다. 이 상태가 조금 더 가면, 나도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지만 남편도 폭발해버리고, 아이도 미치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이 드디어 다가왔다. 나는 남편의 눈빛을 보고 알았다. 오늘 큰일이 일어나겠구나. 그 눈빛에는 '아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가족에 대한 분노'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성난 들짐승의 포효의 가까운 눈빛'이었다.
아이와 아빠의 대립은 결국 남편과 아내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남편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아내에 대한 서운함으로, 아이 앞에서 아빠의 권위를 세워주지 않은 속상함으로 남편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공황발작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순간.
<에필로그>
엄마인 내가 이토록 내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순간. 우리 아이들이 너무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이 고통스러운 갈등과 결정의 순간을 소화해내고 싶습니다. 엄마의 안정이 아이들의 안정이 되는 거니까 빠른 시일 내에 아이들에게 불안함을 느끼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요즘 '이혼'하신 분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해 보입니다. 이 어려운 과정의 결론을 내신 분들이시니까요. 덜 불행한 삶을 위해 삶의 단단한 결단을 내리신 분들을 '존경'합니다. 또한 그 삶은 '존중'합니다. (아름다운 제 삶과 제 삶과 연결된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위해... 저는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요. )
(앞으로 살게될 나의 공간)
내가 놓치고 있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글로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네요. 제 글을 읽고 더 지치실까 걱정이 앞섭니다만 이 순간을 건너뛰기 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보겠습니다.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꼭 마음의 상처와 삶의 곯음을 치유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하루도 무탈히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