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콕맘 예민정 Apr 05. 2021

집에서 놀아봤으면

아직도 전업주부가 집에서 논다고 말하시나요?

‘82년생 김지영’은 베란다 세탁기 앞에 앉아 고단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다.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 베란다 한쪽 귀퉁이라는 걸, 쪼그리고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밖에 누릴 수 없다는 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전업 주부라는 말이 싫었다. 이 단어로 뭉뚱그려지면서 숱하게 무시당하고 존중받지 못했던 모든 엄마들이 생각나서 더더욱 싫었다. 고민 끝에 소개할 수 있는 모든 곳에는 '전업 엄마'라고 쓴다. 주부의 가치는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부르짖어야 존중받을 수 있고 '엄마'라고 하면 왠지 바라보는 시선에서 무시가 한 움큼 빠진 듯한 느낌도 유쾌하진 않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가드를 올리고 싶었다.  


굳이 '주부' 대신 '엄마'라고 말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집에서 놀면서’라는 말 때문이다. 요즘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냐며 놀라는 반응을 보면 조용히 웃게 된다.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그런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뉘앙스만 달라졌을 뿐 전업 주부를 선택한 이에게는 숱하게 들리는 말이다. 결혼 후 회사에 사표를 내면서 제일 먼저 들은 말이 "집에서 놀면 뭐하려고?"라는 걸 떠올려 보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집에서 논다'라는 말은 다소 폭력적인 표현이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느껴진다. 집에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바쁜 걸 정말 모르는 건지.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뭐, 그렇죠..."라고 얼버무리고 마는 날은 꼭 맥주라도 한 캔 마시고 자야 할 것 같다. 


집에서 살림을 한다고 하면 아이도 모두 어딘가에 가고 없는 조용한 집, 누가 치워서 깨끗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드라마를 보는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어떻게 주방마저 완전히 정리된 모습인 건지 비결을 알고 싶다.) 

최소한 내가 아는 ‘엄마’ 중엔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다. 친정 엄마도, 시어머니도, 육아를 하는 내내 만나온 ‘엄마’들도 끝없이 '일'할 뿐이지 그런 상상 속의 모습으로 지내지 않는다. 



주부가 혼자 집에 남으면 뭘 할 것 같은가? 


현관문이 닫히고 거실에 서면 한숨을 한 번 쉰다. 아침이 고단했으니 꼭 쉬어줘야 한다. 안 그러면 숨이 막힐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집안을 한 번 훑어본 후 제일 먼저 아이들이 늘어놓은 장난감을 제자리에 넣고 세탁기를 돌린다. 건조기가 토해놓은 빨래를 정리하여 제자리에 넣고 나면 워밍업이 끝났다. 지난밤에 청소를 했으니 12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쌓인 먼지를 털고 청소기도 돌린다. 주기적으로 싱크대, 화장실, 베란다 청소를 하지 않으면 더러워서 보지도 못한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어도 바뀐 계절 옷도 정리해야 하고 이불 빨래도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껏 여유를 부리지 못한다. 혹은 커피를 마시면서 해야 하는 걸 잊어버린 일이 없는지 뒤적인다. 보물 찾기를 이렇게 잘했으면 부자가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보물은 못 찾고 숨겨진 일거리만 잘 찾는 사람이 되었다. 


배가 고파야 '밥을 먹을 때가 지났구나' 싶고, 쓰러질지도 모르니(졸려서) 커피를 수혈한다. 일과 일 사이에 잠시 틈이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지만 오래 빠져들면 큰일 난다. 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그야말로 낭패니까 말이다.


아이가 아파 밤새 간호를 했지만 평소처럼 집안 정리가 되어있지 않으면 ‘업무태만. 이유가 무엇이든 설거지가 밀려 씻어놓은 컵이 없으면 ‘직무유기’. 

덕분에 대부분 전업 주부들은 상상과는 다르게 부지런히 움직이며 치우고 닦고 정리한다.



© sabrituzcu, 출처 Unsplash




좀 솔직해져 보자.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회사원 중 1분 1초도 딴청 피우지 않고 업무에 매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을 하면서도 개인적인 통화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옥상에 올라가 잡담을 나눈다. 각종 메신저와 인터넷 서핑은 기본이다. 그럼에도 점심시간, 휴식 시간은 칼같이 사수한다. 설사 하루 종일 딴짓만 했다고 해도 논다고 비난받기보다 오히려 개인적인 시간을 챙기면서도 성과를 내니 능력자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장소가 바뀌고 대상이 주부가 되면 같은 잠깐 딴짓도 ‘논다’가 된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려고 유모차에 태워 걷고 있으면 산책도 하고 신선놀음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들린다. 아이는 수시로 울며 놀아 달라 보채니 업고 일을 하면 허리가 아파서라도 잠깐 누워야 한다. 그러다 같이 낮잠이라도 들면 팔자가 좋단다. 


근무시간에 잡담하는 건 휴식이고 육아하다가 누워있는 건 팔자가 좋은 거라니. 대체 뭐가 다른 걸까?



남편은 첫째 출산 후 하던 일을 5개월 동안 쉬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매일 챗바퀴돌듯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치우는 시간을 보내 본 그는 절대 ‘집에서 놀면서’ 같은 오해는 하지 않는다. 


“나도 5개월 밤낮없이 그렇게 지내지 않았으면 집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해보니까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더라. 나가서 돈 버는 게 백 배 나아. 살면서 그때가 제일 힘든 시기였어.”


나는 9년째 전업 엄마로 삼 남매의 주 양육자로 살고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청소는 청소기가 빨래는 세탁기가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해주니 분명히 예전보다는 여유로워졌다. 그렇다고 ‘일정히 하는 일이 없이 지낼’('놀다'의 사전적 의미)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건 아니다.


집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아도 하지 않으면 거슬리는 수많은 일이 존재하고, 그 수많은 일을 무한정 만들어내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덕분에 집이 곧 일터인 엄마들은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일거리가 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할 일이 솟아나는 마법 같은 일터다. 덕분에 불을 끄고 모두 잠이 들어야 그제야 퇴근할 수 있다. 나를 대신해서 움직여주는 가사 로봇이 있으면 누군가 비꼰 것처럼 집에서 노는 날이 올까? 제발 하루만이라도 아무런 부담 없이 집에서 놀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전 02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 ‘엄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