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죠

미안하다 이런 엄마라서

by 로지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못할 일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 '아이가 셋입니다.' 가 더해지면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된다. 대단해지려고 아이를 낳은 건 아닌데 낳고보니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아이를 많이 낳아라. 하나나 둘은 그런 얘기 못 듣는다. 최소한이 셋이다. 뭘 해도 애가 셋이면 다 대단해진다. 셋을 데리고 놀이터를 가도 대단한 엄마가 되고, 마트를 가도 애국자로 입에 오르내린다. 삼시세끼 집밥을 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면 '어떻게 세 명이나 키우면서 매끼 집밥을 해서 먹여요?' 라며 우러러보는 눈빛을 받을 수 있다. 대단해지는거 어렵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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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일까?


경험상 아이는 하나일 때가 제일 힘들다. 왜냐하면 서로가 처음이고 아이랑 엄마밖에 없기 때문에 둘 다 서로에게 심하게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눈빛 하나 손짓 하나에도 과도한 에너지가 쓰인다. 아이가 하나면 꽤 자라서 혼자 노는 시기가 되어도 엄마가 해방되지 못한다. 혼자 노는데는 한계가 있고, 지금처럼 밖에 나갈 수 없을 때는 유일한 놀이 대상이 엄마다. 키워도 키워도 엄마와 함께가 되는 것이다.


첫째는 둘째가 생길 때까지 누워서 잠들어 본 적이 없다. 임신을 해서 안아줄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눕혀재웠지 동생이 생기지 않았다면 두 돌까지도 안아서 재웠을 지도 모른다. 육아의 경험이 없으니 아이에게 휘둘렸다. 키우고 보니 기질이 까다로운 아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절절맬 필요는 없었는데, 모르니 아이를 위한다는 건 힘들어도 하고 봤다.


살림도 처음. 밥 한끼를 하려면 세 시간씩 걸렸다. 아이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아 하루 종일 내 입에 밥 한 톨을 넣을 여유가 없었다. 물 배를 채우다 너무 힘들어서 현미차를 끓여마시고 불어있는 현미로 배를 채웠다. 그러면서 2시간 텀으로 수유를 하고 화장실도 편하게 못갔다. 신랑은 퇴근과 동시에 다시 출근이다. 씻고 아이를 넘겨받으면 그 때부터 나는 저녁을 한다. 밥하는 시간이 오래걸려서 시래기국 하나 끓여서 저녁을 차리면 10시가 넘기 일쑤였다.

저녁을 먹고나면 남편은 하루종일 엉망이 된 집안을 살피고 빨래를 돌리고 널고 개어넣고 설거지까지 마친다. 12시가 넘는다. 신랑이 흔들의자에 앉아 아이를 배 위에 놓고 잠시 쉬는 동안 방에 누워 잠을 청한다. 길어야 2시간. 그리고 나면 교대다. 남편이 자는 동안 밤새 안고 먹이고 달래기를 일 년을 했다. 미련해서 배달 하나 시켜먹을 줄도 모르고, 가사도우미를 쓸 생각도 못했다. 너무 힘들면 야반도주하듯 짐을 싸고 친정으로 갔다왔다. 그냥 그렇게 해야되는 줄 알았다.


둘째가 생기기 전에 대상포진이 왔다. 한 번을 호되게 앓고 조금 호전되는가 했더니 다시 다른 부위에 포진이 또 생겼다. 의사는 무조건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친정에서 몇 달을 보냈다. 그러다 둘째가 찾아왔다.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19개월이 된 큰 아이 어린이집을 찾았다. 동생이 생겨서 보내는 것 같은 애잔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매번 삼십분씩 현관에서 울고 떼쓰는 아이를 보내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같이 끌어안고 울기를 수십번을 했다. (임신중이라 감정 컨트롤이 더 힘들었다.)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보내는 게 맞을까 고민을 수백번 했다. 워킹맘도 아니면서 꼭 이런 시기를 거쳐야하는 걸까?


남편은 단호했다. 무조건 보내라고 했다. 점심시간에 보내고 낮잠시간에 데리고 오더라도 보냈다. 첫 정이라 단호한 것이 가혹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집에서 하는 일도 없으면서 이래도 되는지 고민했다. 기관에 보내는 순간이 고민되는 건 워킹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가 고민하면 아이는 뭔가 잘못된 것이라 인지한다. 내가 고민하는 바람에 아이가 더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지금은 또 미안하다.


둘째가 태어났다. 나는 조금 바뀌었다. 육아라는 장기전에서 내가 쓰러지면 모두 같이 침몰한다는 큰 진리를 깨우쳤다. 첫째를 시간에 맞춰 기관으로 보냈다. 울어도 보냈다. 내가 단호해지니 아이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등원했을 때 즐거움을 늘 상기시켰다. 살림 실력도 늘었다. 둘째를 아기띠에 업고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밥도 했다. 세 끼에 간식까지 꼬박꼬박 잘 챙겨먹었다. 아이가 울어도 내 끼니때가 되면 먼저 먹었다. 애는 잠깐 울면 되지만 내가 굶으면 하루가 망가진다.


첫째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둘째 등원의사를 물어왔다. 2월생이니 꼬박 13개월만에 기관 등원을 하는 셈이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둘째도 적응기간만 꼬박 2개월이 걸렸지만 5월부터 나는 자유부인이 되었다. 제일 먼저 가까운 구민센터에 운동을 등록했다. 엄마 체력과 가정의 행복은 비례한다. 끼니마다 반찬도 풍족해졌다. 힘들면 도움을 받았다. 가사도우미는 그다지 운이 좋지 않은 편이라 주로 배달을 시키거나 생협에 반찬을 사먹았다. 친정엄마도 주기적으로 반찬과 국을 해서 보내주셨다. 삶의 질이 좋아졌다. 엄마 삶의 질이 높아지니 가족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이들에게 훨씬 더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을 줄 수 있었다.


어느 날 셋째가 찾아왔다. 이번엔 입덧이 특히 심했다. 거의 먹지를 못했다.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으며 쓰러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에 아빠가 돌아가셨다. 입덧이 심해 장거리도 못 움직이던 때에 명절이 끝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내려가야했다. 병원에 들러 입덧약과 영양제, 필요한 처방들을 받아 챙겨들고 아빠 장례식을 치뤘다.


Photo by Charles Deluvio on Unsplash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쥐어주기까지



시댁이고 친정이고 모두 지방에 있는 우리는 주변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종종 '우리는 응급차 혼자 타고 가서 혼자 접수해야 되니까 응급실 갈 일도 만들면 안 돼.'라고 말하며 서로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미성년자는 구급차에 함께 탈 수 없다. 손쉽게 아이를 봐 줄 사람이 가까이에 없으니 한 사람은 아이들을 돌보야한다. 함께 응급실에 가 줄 사람이 없는 셈이다.)


뭐가 이렇게 구구절절이냐고 묻고 싶은가? 내가 지금 추구하는 생활을 하기까지 쉽게 한 결정이 아니였다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왠만한 노동보다 힘이 든다. 그럼에도 아이 셋을 키우면서 내가 느낀 건 어떤 경우에도 아이가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르고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있긴하지만 그게 아이 때문이라고 못박아버리면 안된다.

'내가 너 때문에 어떻게 살았는데.' '어떻게 키웠는데.'

부모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는 어떤 것들로 인해 아이에게 이런 말하는 건 순간이다. 이런 말을 안 하려면 부모가 삶의 중심을 잘 잡아야한다. 무조건적인 희생이 정답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첫째를 키우는 동안 우리 부부가 제일 많이 한 말이 뭔지 아는가? '누구도 원망하면 안 되는데 누구든 원망하고 싶다.'였다. 밥을 못 먹는 것도 내 탓, 몸이 망가진 것도 내 탓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디 그런가? 애꿏은 애만 원망하게 된다. '너 때문에....' 약자인 아이는 그저 욕받이가 되고야 만다.


막내가 이제 19개월이다. 5살 둘째와 8살 첫째. 고만고만한 아이들에게 핸드폰 하나씩을 쥐어준다. 각자 원하는 유튜브를 켜는 것을 확인한다. 큰 아이에게 아빠 핸드폰을 주면서 긴급전화로 내게 전화하는 법을 한 번 더 알려주고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선다. 집 앞 공원까지 6Km가량을 뛰고 집으로 돌아온다. 50분정도 시간동안 아이들은 각자 편하고 즐거운 자세로 유튜브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바람직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막둥이가 손가락을 세우고 영상을 휙휙 하는 걸 보면 아찔하기도 하다.) 헌데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사는 방법은 모두가 다를 수 있다. 물론 남편과 내가 가지고 있는 육아관이 남들과 조금 다른 점도 있다. 옳다 그르다로 분류하기에는 세상에 너무 많은 변수와 가치관들이 존재하니 여기서 비난은 받지 않겠다. 엄마는 좀 나쁘면 안 되는 걸까?


부모가 언제가 희생하는 모습으로만 아이들에게 비춰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맛있는 것도 부모가 먼저, 하고 싶은 것도 부모 중심, 부모의 삶의 가치를 먼저 놓고 생각한다.

나는 읽겠다고 계획한 책을 읽고 나서야 아이들 책도 읽어준다. 사정이 생겨 못읽으면 아이들 책 읽어주는 시간도 없다. 부부가 운동하는 시간은 아이들 유튜브 타임이다.(아이들은 엄마아빠가 운동하기만을 기다린다.) 날씨 좋은 주말이지만 아빠가 쉬고 싶으면 집에서 지낸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나쁜 부모일지도 모르겠다.



Photo by Marisa Howenstine on Unsplash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시금 육아의 기본을 되새기는 요즘이다. 아이가 말을 걸어오면 설거지하다가도 손을 놓고 눈을 맞춘다. 슬프면 충분히 슬픔이 지나갈 때 까지 안아주고 기다려준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그림 도구를 건내주고, 클레이 놀이를 하고 싶다면 방을 마음껏 어지르고 놀아도 혼내지 않는다. 아이 셋이 들어가 화장실에 물놀이하는 건 덤이다.

하지만 본인이 먹고 논 쓰레기는 스스로 버리고 정리해야한다. 부모에게 버릇없이 구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유튜브를 보더라도 약속한 시간이 되면 스스로 끄고 반납해야한다. 낮 시간 아이들과 바깥 놀이를 했다면 저녁에는 엄마 아빠가 휴식을 취하는 것에 적극 협조한다. 장난감은 산타할아버지가 주시는 것 외에는 거의 없다.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육아는 장기 레이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무조건적인 희생과 포기는 모두가 불행해지기에 충분한 조건이 된다. 사랑은 충분히 주되 적당히 이기적인 부모가 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너 때문에'라는 말을 하지 않을 방법. 모든 선택을 부모가 하고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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