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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이동한 자리

전남편을 닮은 아들 눈썹

by 정루시아

주미가 씩씩하게 길을 나섰고, 수연은 신발을 풀어 안에 들어간 흙을 털어낸 후 다시 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자꾸만 자신에게 되물었다.


전남편과 이혼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정말 자유로운가?
이혼에 대해 내게는 책임이 전혀 없던가?


남편이 아들을 사랑해서 하는 잔소리임을 알고 있었지만, 얼굴을 들지 못하던 민이의 모습이, 그런 아들 옆에서 아무 말도 못 하던 자신이 싫었다. 남편의 말은 언제나 아들을 향해 있었지만, 수연은 그 말들이 마치 자신을 향한 말처럼 들렸다. 수연의 등 뒤에서, 남편이 들으라는 듯 말하던 그 말들로.

남편은 아들 민이를 한껏 다그쳐 놓고는, 밤이 되면 침대에서 수연을 안으려 했다. 맞은편 방에서 과제와 학원 숙제를 하고 있었을 민이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이러고 싶어? 싫어!”


“왜? 뭐가?”


“다음에 해. 당신이 민이한테 뭐라 하면 정말 짜증 나. 내가 그 소릴 듣고 하고 싶겠어?”


“무슨 소리야? 걔는 걔고 당신은 당신이지.”


“아니, 민이 공부하는데 당신은 여기서 그걸 하고 싶어?”


“아니 고등학생 부모는 섹스도 안 해? 섹스는 기본 욕구야. 왜 안 해?”


“난 싫어. 그렇게 쥐 잡듯 애를 몰아놓고 그걸 하고 싶냐고. 당신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당신은 그게 문제야. 부부가 섹스를 하는데 왜 애 상황을 봐. 걔는 걔 인생 살고, 우린 우리 인생을 사는 거지.”


“공사 구분이 그렇게 잘 되는 사람이 왜 애를 그렇게 닦달해? 그냥 해달라는 것만 해주면 되잖아. 정작 구분 못하는 사람은 당신 아냐? 민이는 당신 소유물도 아닌데.”


“내가 민이를 언제 소유물로 여겼어. 그냥 공부할 때 잘해서 고속도로처럼 편한 길을 가라고 일러주는 거지. 지방국도랑 고속도로가 같아? 굳이 구불거리는 길을 왜 가냐고. 조금만 노력하면 고속도로가 열리는데.”


“또 시작이네. 그래, 나는 지방국도 달려봤거든. 볼 것도 많고, 쉴 곳도 많고 좋더라. 그래서 난 민이한테 잔소리 안 해.”


“아휴, 또 시작이다. 됐어. 됐다. 하지 말자. 내가 왜 당신한테 구걸하듯 섹스를 해. 싫으면 관둬. 참.”


민이가 힘들어하던 만큼, 수연의 가슴에는 찬바람이 들이쳤고, 그 찬바람은 결국 남편에게 싸락눈처럼 쏟아졌다. 남편도 처음엔 수연을 어르고 달래며 부부관계를 시도했지만, 수연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한 번 시작된 냉기는 침실을 떠나지 않았다.


걸으며 생각에 잠긴 수연은, 전남편이 민이를 소유물처럼 휘두른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자신이 민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남편은 성인 남성으로서 욕구에 충실했을 뿐, 성인 여성인 자신은 아들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바람에 남편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다. 아들을 사랑하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랑이 남편에게서 민이에게로 쏠려버렸다는 걸… 자신도 모르게.


깨달음의 순간, 수연의 가슴속 냉기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에, 전남편의 눈썹을 닮은 민이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헛웃음이 나왔다. 전남편의 독설과 불륜이 존중받을 수 없는 행동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자신 역시 남편을 거부하며 그를 소외시켰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울창한 유칼립투스 숲을 걷다 보니, 머리가 멍해졌다. 아들 민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사랑 덕분이고, 또한 전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슴에 5월의 뜨거운 공기가 들어찼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고통에 베인 발을 디디며 수연은 저도 모르게 웃고 울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쉼 없이 흘렀지만, 수연은 카페에서 기다릴 주미를 떠올리며 씩씩하게 걸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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