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자극적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을 것 같았다.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착취가 치유가 되면 좋겠다.'였는데 그게 얼마나 모순적인지, 따지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혼자 골몰했다. 나는 왜 그런 표현을 쓴 것인가 하고.
가족 중 누군가가 집에 돌아왔을 때, 특히 나의 어린이들에게 엄마가 가장 자주 물어보는 말은 "배고프나?"다.
"배 안 고파요."
하는 대답이 돌아오면 다행이 묻어나는 얼굴로
"그래, 천천히 먹자"한다.
그러나
"배고파요~"
하고 말하면 약 1.2배의 속도로 엄마의 동작이 빨라진다.
조급이 묻어나는 얼굴이지만 나는 그 얼굴의 엄마가 훨씬 행복해 보인다고 느낀다.
그다음으로 행복해 보이는 때는 구체적인 음식을 콕 집어서 "할미, 000이 먹고 싶어요" 할 때다.
둘째는 미역국을, 나는 소고기뭇국을, 막내는 고기를, 첫째는 카레를 찾을 때가 많지만, 내 기억보다 훨씬 다양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엄마가 가장 힘들어 보일 때는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다"라는 반응일 때다.
아마 부엌살림하며 매 끼를 차려야 하는 사람이라면 열렬히 공감할 것이다. 식구들의 끼니를 혼자 고민하고 준비할 때의 그 막막하고 외로운 기분 말이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일반적인 감정에 더해 특별한 의미를 더 부여하곤 한다. 자신의 음식을 입맛에 맞지 않아 한다고 오해하는 것까지는 그래, 그럴 수 있다. 평소 엄마 음식은 최고라고 엄지척을 무시로 날리지만,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로서는 인상적이지 않은 피드백이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입맛 없어하는 식구들의 반응이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 도움 되지 않는 사람으로까지 느끼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한 번도 직접 물어본 적 없지만, 엄마의 혼잣말에서 충분히 눈치챌만 했다)
한국의 엄마들이 갱년기를 더욱 힘들게 맞이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는 기능하는 엄마, 즉 도구적인 모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모녀의 세계(김지윤)'에는 모성을 도구적 모성과 관계적 모성으로 구분한 뒤 한국사회의 엄마들은 도구적 모성에 익숙하다고 설명한다. 그 책에 따르면, 매 끼 식사를 차려내고 가족들을 잘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바로 도구적 모성의 예가 된다.
나는 격려나 인정, 지지와 칭찬으로 소통하는 관계적 모성이 더 중요한 딸인데, 엄마는 그 사실을 알 리 없고, 엄마 역시 관계적 모성을 받아본 일이 없다.
아무런 기능적 효용이 없어도 가족이니까, 엄마고 할머니니까 사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엄마에게는 그저 캠페인 표어 같은 말이다.
70여 년 가깝게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다.
부모의 사랑은 부성, 모성이라 하는데,
자식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은 왜 없을까.
아, 있다.
효, 혹은 효심이라는 말.
엄마는관계적 모성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관계적 효심을 받을 수는 있다. 엄마(할미) 최고야, 괜찮아, 고마워, 사랑해요(이 말은 사실 한 번도 못해봤다)를 꾸준하게 외치다 보면, 엄마의 결핍도 끌어안고 살만한 흉터가 되지 않을까.
아마도 관계적 효심만으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도구적 효심과도 병행함은 물론이다.
엄마, 비 오니까 찌짐 먹고 싶어. 할미, 라면도! 안성탕면으로!
*도구적 효심:부모가 원하는 바를 행함으로써 효를 다하려는 마음. 부모가 자식의 공부를 원한다면 시험에서 일등이 되는 게 그 예다. 나의 경우는 엄마가 스스로 효용가치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므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주문하기로 한다.
길게 썼지만, '효년'이란 얘기다.
**커버 사진은 표충사 놀이터에 갔다가 도토리를 한그슥 주운 둘째가 "할미 이걸로 도토리묵 해주세요"해서 정말로, 진짜로 집에서 만든 수제도토리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