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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Sep 04. 2024

엄마의 응보(應報)는 나다.

의외로 삶의 동기는 '타인'에게 있다.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삼촌들의 이른 죽음은 '인과응보'라고.

그러나 내가 아이를 낳고, 제발 살아만 달라 기도했던 이들의 많은 죽음을 겪고 나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암'과 같은 질병은 교통사고처럼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운일 뿐, 자기 관리나 살아온 세월의 상벌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 매일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던 엄마가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 계신 역시 행운이다.

그래도 한 가지,

엄마에게는 외삼촌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 사는 게 지옥 같을 때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믿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을 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엄마의 세월이었지만

엄마는 죽지 않았고, 당연히 나를 살렸고, 외할를 5년이나 살게 했다.

그리고 엄마가 들려준 이십 년 전 에피소드에서 나는 엄마의 비범함을 확신했다.




막내 외삼촌이 암투병 할 때 경제적 사정은 말해 무엇하랴. 엄마는 여전히 밤에 일하고 낮에 삼촌을 간병하러 매일 병원에 드나들었다. 버스비도 아끼느라 한여름 땡볕에 한 시간 씩을 걸어다녔던 때다. 지역 내에서 가장 큰 3차 병원이라 정말 많은 사람이 오가는 병원인데, 하루는 병원 로비에 앞서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똥을 싸버리더란다. 입고 있던 바지가 흥건하게 젖었고, 아주머니는 어쩔 줄 몰라 서 있고, 사람들은 쳐다보고, 냄새는 나고.

그 아주머니가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병원 직원도 아니고 나는 가면 그만인 상황 아닌가.

나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지하 매점에 내려가서 고무장갑과 휴지와 속옷을 손에 잡히는 대로 사서 들고 왔다고 했다.

사람이 나이가 먹으면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가 있다고, 얼마나 부끄러웠겠냐고 엄마는 이십 년 전 얘기 담담했다.

나는 원체도 리액션이 잘 없는 딸인데다, 뭐라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엄마의 행동이라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세상 사람을 극단적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

자기 자신 돌보기도 빠듯해서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과 자기 대신 타인을 돌보는 데 온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엄마는 후자다.

타인의 곤경을 어떻게 지나치지 않고 내 일처럼 도울 수 있는가? 불쾌하고 역한 오물에 내 손을 댈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여유라고는 전혀 없는데.

김지윤 소장이 쓴 <모녀의 세계>라는 책에는 그런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K장남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가문을 세운다는 인정과 보상이 따랐다고, K장녀에게는 희생이 당연하게 주어질 뿐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고.

하지만 우리 엄마의 세월에 대한 응보는 나라고 믿는다.

엄마가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억울해할 때마다,

"내가 잘됐잖아. 엄마가 그렇게 고생해서 내가 복을 받았잖아. 내가 이만큼 사는 건 엄마 덕분이야"라고 내가 는 것은 순도 백이십 퍼센트의 진심이다.


엄마에게 있지만,

외삼촌들에게는 없었던 것.

그건 타인을 쌍히 여길 수 있는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다.

외삼촌들은 자기 자신이라도 불쌍히 여기고 잘 돌봤어야 했다. 그렇게 죽지 말고, 우리 모녀 약 오를 만큼 잘 살지. 그래야 미워하든 말든, 따져 묻든 말든, 보상 받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지금도 엄마는 '내가 죽으면 내 딸 혼자 어떻게 살겠노'하는 마음으로 산다. 엄마에게 나는 삶의 이유이자 결과인 셈이다.

사람이 삶을 유지하는 데 '타인'만큼 강한 동기가 없는 것 엄마는 삶으로 가르친다.





덧.

버튼을 잘못 눌러서 그만 연재요일이 아닌데 발행해 버렸습니다. 다음부턴 연재요일을 지키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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