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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Aug 31. 2024

엄마를 과소비한 사람들

엄마는 어쩌다가 외할매의 병간호를 시작했나.

엄마가 어쩌다가 외할매의 병간호를 떠맡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 중요한 문제를 나는 그동안 엄마의 성정 탓으로만 돌렸다. 약간의 이기심도 없이 타인의 고통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내가 아니면 안돼'라는 미련스러울 정도의 책임감을 가졌다고 말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엄마처럼 안 살아야지'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는 평생 남은 게 없어도 너무 없어서 딸 시집갈 때 왜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게 없냐고 펑펑 울었었다. 그러나 울기 전에 미리미리 자기 몫의 재산이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잘 챙겼어야 했다고, 가족보다 자신의 삶을 더 챙겨야 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외할매에게 5명의 자식이 있었다는 것을.

엄마의 고생은 엄마가 원한 일이었을까?

엄마는 넷째 딸이었고, 큰오빠, 작은오빠, 언니, 그리고 막내 남동생이 있었다.

외할매가 풍을 맞아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경남 산청이란 시골에서 엄마와 둘이 살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엄마가 시골집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아무 말 없이 꼭 안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서울행.

하루 이틀, 길어야 일주일 있을 거라 생각했던 병원 생활이 한 달이 되었다. 


어떻게 엄마는 그 불편한 병원 생활을 나를 데리고 한 달이나 하게 되었을까? '애 학교 보내야 한다'라고, '너희 모녀가 너무 힘드니 이제 그만 산청으로 내려가, 여기는 우리가 잘 지켜보겠다', 그런 말을  아무도 안 한 걸까? 아니면 누군가 한 말을 엄마 스스로 적극 사양한 걸까?


서울에는 작은외삼촌 가족이 살았다.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운 강원도에 큰외삼촌 가족이 살았다.

서울에서 가장 먼 경남에

혼자서 아들 둘을 키우는 이모가 살았고,

혼자서 딸 하나를 키우는 엄마가 살았고,

미혼인 막내 외삼촌이 살았다. (막내 외삼촌은 할매가 쓰러지기 전까지 외할매가 해주는 밥 먹으면서 같이 살았다.)

이들 중에 반드시 엄마가 외할매의 병간호를 떠맡아야 할 어떤 합리적 이유가 있었을.

딸이 하나밖에 없으니 이동성이 좋아서.

그럼 홀몸인 막내 외삼촌은?

삼촌들은 돈 벌어야 하니까.

우리 엄마도 돈 벌던 중이었는데? 엄마가 벌어야 우리 두 식구가 먹고살았는데?

그렇다고 우리의 생활비를 각자 매달 갹출하여  공동부담으로 챙겨주겠다는 약속도 전혀 없었다.


그때 어른들 사이에 어떤 대화와 합의가 오갔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후의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엄마 혼자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보며 짐작할 뿐이다.

그들은 무책임했고, 이기적이었고, 엄마를 과소비했다.

외할매의 재산이 먹고 살 만큼은 있던 시절에 삼촌들은 그들의 삶을 찾겠다고 타지로 갔고, 사고를 쳤고,

수습할 때마다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고 한다.

왜 아들들은 당당하게, 뒤돌아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찾아가는데

딸인 엄마는 집에 있는 남동생을 위해 나무를 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했을까. 좀 더 커서는 공장에 취직했고, 점심으로 나온 빵은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갔을까.

아무도 그렇게 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한 사람도 없었다.

어린 엄마를 돌봤어야 할 외할매도,외할배도,삼촌,이모들도.

너무 가난하고 사는 게 바빴다는 핑계,

다들 그러고 살았다는 말,

전쟁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대에 그런 돌봄의 개념이 있었겠느냐고 말하면 안 된다.

모녀로 구성되었던 연약한 단위의 가족이 아무 돌봄을 받지 못했고, 고혈압으로 쓰러져 운신이 불가능한 팔십 노인의 돌봄을 도맡기까지 했다.

엄마의 다른 형제들이 마음'만' (마음'조차'  불편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게까지 쓰지 않겠다.) 불편하게 살 수 있는 권리는 어떻게 가능했지, 나는 지금이라도 알고 싶다.





한 달의 병원 생활 뒤 우리는 할머니와 막내 외삼촌이 살던 마산의 1층 주택에 함께 살며, 이후로 5년이란 시간을 엄마는 외할매의 간병에 매달렸다. 막내 외삼촌은 외할매가 쓰러지기 전에도 겨우 라면만 끓여먹고 살던 사람이라 엄마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삼촌과 다툼이 잦았 어느 날, 엄마가 나를 데리고 도망친 날이 두어달 있었다.

멀리는 못 가고 외할매집 근처에서 세 들어 살았는데

외삼촌이 자꾸 외할매를 때린다는 동네 사람들의 말이 들려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지옥불로 들어가기도 했다.

병든 노모에 대한 아들의 폭력은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희생을 계속하지 않는 딸에 대한 은근한 사회적 억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무도 다시 돌아가라 하지 않았지만,

돌아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시선과 분위기가 있지 않았겠는가.

가족이니까, 딸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것만 같은 역할들, 또 사람들의 시선과 분위기. 그런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엄마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좀더 자신을 위한 삶을 살며 지금보다는 삶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외할매는 끔찍이도 사랑하던 아들들이 보고 싶으셨는지, 돌아가신 지 3년쯤 지나고부터 삼촌들이 하나 둘 암에 걸 지금은 언니(나의 이모)만 살아계시고, 남자 형제들은 다 돌아가셨다. 

지긋지긋한 기분으로 덧붙이자면,

암이 온몸에 전이된 막내 외삼촌의 간병 또한 엄마의 몫이었다는 것.

그때까지도 막내 외삼촌은 미혼이니까, 정말로 엄마 아니면 가족이라곤 아무도 없으니,

그래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치자.

그러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도 방법이 있었지 않을까? 제와 그 방법을 안다고 한들 너무 늦었겠지만.


우리 엄마

딸로 태어나서 너무 고생했다.

무수히 많은 딸들, 정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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